12월의 시작이라는 것은 나름대로의 여러가지 의미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이 내게 주는 의미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정리'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지난 시간들의 수많았던 순간들을 고이 접어 과거라는 이름으로 봉인하는 일과 막연하게 혹은 혹시나..라는 미련과 기대를 남겨 두었던 미래를 좀 더 멀리 미뤄두는 것이랄까. 사실 겨울을 기다렸으면서도 한편에서는 내심 조금은 늦게 와 주었으면 바란 것도 이 정리를 해야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달력을 보고 지난 시간들을 하나 둘 돌아보며 조금은 아쉬운 웃음으로 넘겨 버릴 수 있게 되었고 모아 두었던 기억의 단편들을 보이는 것이던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던 하나 둘 내 기억과 시야에서 지워나간다. 겨울의 기억이 유난히 많은 내게 이 계절은 생각만큼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시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이 계절이 아니면 머릿속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기억의 조각들과 방안 곳곳에서 떠돌고 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온전히 찾아 떠나보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방 구석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채 잠들어 있는 커다란 여행 가방에서 오랜 기억의 흔적들을 끄집어 내고 이제는 다시 그것들을 마주 하지 않으련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을 텅 비워가는 작업도 내가 겨울에 해야하는 일이다. 수많은 약속과 다짐들, 다정한 말과 글들이 이제는 부질없는 한숨의 이유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더 이상 내 주변에 놓아둘 이유도 없어졌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나 홀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뿐 아니라 이전의 기억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몇번을 망설이다 치워나간다.


생각해보면 지난 추억의 흔적들 특히나 물리적인 흔적들을 보관한다는 것은 꽤나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결혼까지 이르러 한 집에 살게 된다면 그 흔적들은 미래의 어느날에 다시 들춰보아도 즐거운 서로의 공감대가 되겠지만 이미 다른 사랑을 찾아 다니는 사람 혹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과 나눈 기억들을 나 혼자 보관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찌질하거나 비참한 일이 아닐까. 남자의 기억의 방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남자의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유치하고 어리석은 모양이다.


혹시나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알게된 첫 소식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더라..라는 이야기일 때는 내심 섭섭하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시원하기도 한 그런 감정이 교차하게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사귄 게 얼마나 오래인데.. 둘이 아니면 못 산다며..'라는 말을 되새기며 한탄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보편적으로 여자의 사랑은 그렇게 대상이 옮겨가면 지난 시간은 새로운 시간으로 덮어 버리는데 이것을 남자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생물학적인 특성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전혀 없다.


아무튼 지난 기억들을 하나 둘 끄집어 내어 눈 앞에 놓고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을 찬찬히 바라본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여러 장면들이 눈앞에 스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마음이 쓰리지는 않는 것을 보면 이제는 이런 물건들이나 기록들을 보관해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나름의 확신이 서는 모양이다. 텅빈 가방을 보니 뭔가 휑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서..라고 위안을 해 본다.

요즘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내게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닐까라는 조금은 회의적인 생각마저 드는 상황인데 나이가 하나 둘 더 들어갈 수록 뭐랄까 '사람'자체가 좋아 사랑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확률은 극히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때문인지도 모르겠다.


Nikon F3hp, Ai Nikkor 105mm f/1.8S, Ilford XP2. LS40

예정에도 없었다. 사실 이 영화는 보지 않으려 했다. 아니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에 혼자 가지 못 하는 성격 탓도 있고 오래 전 기억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이 제법 컸기 때문이다. 영화평을 보니 호평만큼이나 혹평도 많아 어느 샌가 관심을 끊고 지냈다. 게다가 이제 극장에서도 내려갈 즈음인 그런 영화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늦은 저녁 컴컴한 극장에 홀로 앉아 영화를 봤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정확하게 두 번이다. 이 영화는 내게 두 번의 눈물을 주었다. 아마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포인트는 다를 듯하다. 하지만 적어도 비슷한 시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한 번 정도는 가슴이 찡하게 아려오지 않을까...

나는 정릉에서 나고 자랐는데 영화의 시작이 정릉이다. 신기하다 싶어 이어지는 장면들을 보니 버스에서의 장면이며 학교에서의 모습이며 오래 전 나의 기억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참 별일이다 싶었다. 어설픈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을 만들어내기 위해 안타까워했던 수 많은 날들,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어서도 말조차 꺼내지 못 했던 시간들, 힘들게 시작했지만 짧았던 연애와 오해로 빚어진 엇갈림, 그리고 세월 속에 자연스레 잊힌 사람... 

영화를 보는내내 마음속 깊은 구석에 감추어진 채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가는 기억의 상자들이 하나둘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화면에서 펼쳐지는 장면장면들에 내 기억을 겹쳐가며 '그때는 그랬었지..'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올 즈음 나는 영화를 본 것이라기보다 젊은 날의 내 삶을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동안 재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과 달랐던 마지막 결말...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이 결말은 조금 잔인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그것이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기에 그 또한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났어도 줄거리나 배우들의 연기보다 나의 오래 전 기억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장면들에 내가 들어가 그 상황을 연기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아니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첫사랑..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첫사랑은 그렇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안타까움이나 아쉬움보다 따뜻함, 편안함으로 기억된다. 비록 한 번의 엇갈림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지만 내게 그런 기억을 준 이에게 고마운 마음만 남아 있으니까...

참 그때는 그 첫사랑이.. 그 풋사랑이 마치 세상의 전부였던 것같았다. 도서관에서 우연을 가장해 보기도 하고 버스 타는 시간을 알아내 같이 타 보기도 하고... 그렇게 몇 달을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그녀를 만났음에도 한 마디도 못 하고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던 그날의 기억... 비록 아주 짧은 연애였고 우리 둘의 문제가 아닌 이유로 헤어져 지금껏 만나지 못 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처럼 순수한 마음만으로 사람을 바라봤던 시절도 없었지 싶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그런 순수함이나 열정은 식어갔다. 현실, 생활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절박함 속에서 낭만이나 꿈 혹은 풋사랑은 그저 감상적인 단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참 오랜만에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감정을 감성을 다시 두드려 깨워주었다. 그것으로 됐다. 극장에 혼자 가는 어색함도 옆자리가 비어 있는 허전함도 이젠 그냥 한번 웃음으로 넘겨버릴 수 있어야 하니까...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닐까 싶다. 애타는 마음과 설레는 마음과 눈물과 기쁨을 모두 간직한채 그렇게 마음속에 담아두고 평생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그 첫사랑을 위한 그런 영화가 아닐까... 내가 기억하는 그녀 역시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백팩을 맨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까...


덧) 기억의 습작, 네버엔딩스토리 두 곡은 내가 노래방에 가면 늘 부르던 곡이다. 기억의습작은 과거의 네버엔딩스토리는 현재의 감정을 좀 더 담고 있지 싶은데 영화에 기억의 습작이 들어가 있던 점은 참 내게는 각별했달까...

덧)  예스24에 리뷰 올렸더니 한 편 더 보라는군요 :)







Waterman Carene & CARAN d'ACHE Blu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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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했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참 공감이 많이 간다. 특히 내 경우에는 더 그런 느낌이 강하니 말이다. 김제동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자는 첫사랑을 기억에 남기고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남긴다."는 말 역시 내겐 각별하다.

지난 사랑을 추억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평생 누군가를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행복한 일이 아닐까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본다. 그러고보면 그 이후 난 깊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랑이라는 감정을 잊었을지도...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일어의 '初戀' 역시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고 영어의 First Love도 느낌이 참 좋다. 다른 나라의 말들도 제법 멋드러진 표현이 아닐까 하는데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한 탓에 더 이상 적을 말이 없는 것이 아쉽다. 혹시 다른 외국어를 아시는 분이 계시면 답글로 소개해주시면 좋겠다.

일어 이야기가 나와서 잠깐 적자면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初戀이외에도 冬月이 있다. 후유츠키라고 읽는데..오죽하면 이 성을 가진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두 단어 모두 조금은 쓸쓸하다. 내 인생의 주제는 늘 이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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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가 있었던 장소라면 역시 잠실이다. 처음 시작한 연애의 장소였고 그 아이의 집이 있던 곳이었는데 데이트를 할 때는 내가 잠실에 가 그 아이를 만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공항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잠실 롯데백화점에 내리면 언제나 환한 얼굴의 그 아이를 볼 수 있었고 벌써 헤어진 지 수 년이 지났음에도 잠실과 신천 주변은 내게 각별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직장이 될 회사가 있는 곳도 잠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올림픽공원 앞. 며칠 차를 몰고 그 아이의 집 앞을 바로 지나가면서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한 그 주변을 돌아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긴다. 인연이란 참 맺기도 어렵지만 끊기 또한 어려운 것인가보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간다는 것만 해도 참 큰 인연인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앞으로 많은 시간을 또 난 이 거리를 걸을 것이고 가끔은 그 아이와 찾아갔던 상점이나 같이 걷던 거리를 나 혼자 찾아가볼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 못 잊는다 하던가..적어도 내 경우라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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