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혹은 비원(이 이름에 대한 여러 의견도 있지만)이 일반에 공개된 다음 참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정원이 정해져있고 사전에 예약을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그만한 수고(?)를 들여 가볼만한 곳이 아닌가 싶다. 작년 여름에 이곳에 들른 이후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찾았는데 몇 가지 바뀐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입장만 확인을 하고 자유관람이 가능해졌다는 게 가장 큰 차이였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설사를 따라가기보다 각자 길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래도 내 생각으로는 해설사를 따라가며 곳곳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훨씬 낫지 싶다. 작년에는 한 바퀴 관람시간이 2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1시간 30분으로 줄어든 것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후원은 해설사분도 이야기하듯 가을이나 초봄 혹은 겨울이 제격이다. 작년 여름은 그나마 비가 조금 내려 괜찮았지만 오늘은 무더운 날씨 탓인지 그 공간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덥다는 말부터 절로 나왔다. 무엇이건 제대로 감상을 하기 위해서 주변 환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경험한 하루였다.

부용정은 수리 중이어서 오늘은 보지 못했는데 대신 오리인지 이름모를 새 식구가 부용지 위에 집을 짓고 있었다. 집 모양새를 보니 사람들이 만들어준 집이고 35미리 단렌즈로는 아기들의 모습까지 담아내기는 쉽지 않아 확대를 해보았다. 부용지 주변에는 어느 국빈인가가 방문해 이 더운 날씨에 선글라스에 긴 정장으로 무장한 이들이 죽 배치되어 있어 그리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후원의 장점은 무엇보다 고즈넉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는게 아닐까. 평일에도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가긴 하지만 구석진 곳을 잘 찾아보면 정말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각각의 장소마다 담긴 사연들을 하나 둘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조선 시대 어느 날의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과거를 그대로 현재로 끌어오는..

곳곳의 정자들에 방석을 가져다놓고 책도 몇 권 가져다두고 앉아서 책을 보라는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몇몇분들은 자리 펴고 누워서 주무시고들 계셔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후원 자체가 독서와 공부라는 면이 강조되고 있는 장소인데 그런 취지를 살려보고자 하는 행사같지만..글쎄다..아무리 좋은 의도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은 거의 찍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작업은 한편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느 곳의 분위기를 마음껏 느껴보고 싶다면 카메라는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는 것이 훨씬 낫다. 게다가 어머니와 함께 찾은 일정인지라 어머니 사진을 찍는 것이 좀 더 큰 행사(?)였다.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는 여러 곳을 다녀보고 싶어 하셨다. 오늘의 후원 관람 역시 그렇게 출발한 것인데 당신이 중학교 때 와보시고 이제껏 와보지 못하셨단다. 평생을 서울에만 살았는데 이곳을 다시 찾는데 5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큰 아들이 되어서 부모님 모시고 이곳저곳 여행이라도 마음껏 다녀보지 못한 것이 참 후회스럽지만 이제라도 조금씩 다녀볼 생각이다. 

어머니는 '네 뒷모습을 찍어 줄 사람이 누가 있냐'며 가끔 내 뒷모습을 담아 준다. 뒷모습을 담아 준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깊은 의미가 있다.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뒷모습을 담아보자. 생각보다 많은 것들은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얻을 수 있다.

나는 내 사진이 사실 거의 없는 편인데 어머니와 다니면서 참 많은 사진들을 남기고 있다. 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시는 어머니를 보는 게 좋아서기도 하지만 뭐랄까.. 그렇게 많은 사진 폴더 안에 정작 그 사진을 찍은 내 모습이 없다는 게 조금 억울해서일까? 그래도 여전히 사진 찍히는 것은 어색한 일이고 표정은 늘 굳어있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는 '밝게 웃어요~'라고 외치면서도 말이다..



비원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일제의 흔적은 아니라고 한다.

뒤늦게나마 찾아간 그곳은 그말의 어원이나 설왕설래하는 이야기들을 차치하고라도

내 마음 속에 숨겨진 정원으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D300, AF-S 35mm f/1.8 ISO800 B&W Conve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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