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기회장에게 결국 친구 녀석이 운명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가는 것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병원에 입원한게 이번 달 초였으니 한 달만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현역 제대하신 분들 중에 아직도 동기들 모임을 갖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장교들의 경우 기수 구분이 되어 있고 그 기수는 평생 자기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인식표가 되어 남아 있게 됩니다. 제 경우는 학사장교로 군에 갔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던 날 입대해서 유난히 훈련이 혹독했던 기수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통신 병과였고 저는 보병 병과였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 중에는 얼굴을 잘 몰랐지만 최전방 사단으로 배치를 받고 우연치 않게 그 친구와 제가 신병교육대에 배정을 받았었습니다. 물론 행정 착오였는지 저는 그날 밤 다시 전방으로 올라가 수색대에 근무하게 되었고 그 친구와는 근 2년 넘게 연락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중위를 달고 몇 개월 후에 저는 다시 신교대로 돌아왔고 오래 전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교대에는 학사장교 출신들이 4명이나 있어 제법 부대 내에서도 재미있게 지낼 수가 있었는데 전역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서 연락을 뜸해졌죠. 물론 제가 게으른 탓에 먼저 나서서 이리저리 찾아다니지 못해서였지만 그 친구는 전역 후에도 저를 제법 오래 찾았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전에 글을 적었듯이 간경화 말기라는 소식을 대학 후배를 통해 듣고 다음 날 대구로 내려가 그 녀석 얼굴을 본 것이 결국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보내기 전에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을까요..

죽음이라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삶의 연장선 상에 위치한 그래서 결국은 누구나 다다르게 되는 하나의 지점이지만 막상 당장 지금 이 시간부터 누군가를 볼 수 없고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남아있는 이들에게는 참 고통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사소통이라는 것  (0) 2009.01.15
2009년 토정비결  (14) 2009.01.05
한 번 솔로는 영원한 솔로..  (4) 2008.12.26
일상으로의 복귀  (0) 2008.12.26
Sein und Zeit  (0) 2008.12.25

10년만에 친구를 만났다. 정확하게는 97년 전역 후니 11년이 되었다.

이런저런 문제들로 고민이 제법 깊어지던 어느 날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학 후배인데 혹시 학사장교 XX기가 아니세요?"로 시작된 전화는 처음 소위로 임관한 후 자대로 배치를 받았을 때 하루를 같이 보내고(나는 당일 수색대로 전출이 되었다) 중위 말년에 1년 정도 같이 군 생활을 한 동기 녀석이 간경화 말기라는 소식으로 이어졌다.

다음 날 바로 대구로 향했다. 대구는 장교 교육을 받던 94년 이후 첫 방문이다. 10여년 만에 본 동기의 얼굴은 황달기까지 돌아 초췌함 그 자체였다. "2주 안에 적당한 이식장기를 찾지 못하면 살기 어렵다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던가. 차라리 몰랐더라면 괜찮았을텐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첫 마디가 바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으니 오히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두 아이와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한 친구는 이제 일주일의 여유도 남지 않은 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다. "너 RH-라며? 내 아들이 그 혈액형인데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수혈 좀 해줘"라며 아들의 전화번호를 불러주는 친구의 말에 전화번호를 메모하며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할까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죽음을 마주해야할 필연을 가진 것이지만 그 시기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수명이 언제 끝이 날지를 알게된다면 하루하루의 삶에 대해 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할 것일까..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번 솔로는 영원한 솔로..  (4) 2008.12.26
일상으로의 복귀  (0) 2008.12.26
인생에 관한 재미있는 공식  (4) 2008.12.09
동생의 결혼  (0) 2008.12.08
겨울 준비  (2) 2008.12.01

유서 즉 遺書 란 단어의 의미 그대로 남기는 글이다. 내가 지금 유서를 쓴다면 '젊은 나이에 무슨 허튼수작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당장 오늘 혹은 내일 어떤 상황에 직면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것보다는 미리 한 장 정도 적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유서를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군 시절 대간첩 작전이 진행되었을 때 소대원들을 데리고 작전에 들어가기 전 적었던 기억이 있다. 수색대라는 특성상 오로지 전진만이 있는 상황에서 실탄으로 무장한 채 작전에 투입될 당시는 나름대로 비장했던 것 같다. 그때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 애석하게도 전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유치한 내용이었지 싶다.

소위를 단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나름대로 어설픈 국가관이 담겨 있었을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숫총각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내용이었건 처음으로 적은 유서와 머리카락을 담은 봉투는 어디론가 보내졌고 이후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삶이라는 이면은 늘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그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 아직 준비를 못했는데 다음에 오시면 안 될까요?"라고  이야기한다고 통할 노릇도 아니니...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고 이 또한 순차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니다.

유서를 적는다는 것은 그래서 생을 마무리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준비하는 작은 작업이다. 지금 인생을 얼마나 정리해두고 있는지 자문해보자.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와 사회생활  (0) 2008.07.01
인터넷 시대에 글쓰기  (0) 2008.06.18
언제부턴가..  (0) 2008.06.11
휴가  (2) 2008.06.03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나..  (2) 2008.06.01

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했을 때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을까 꽤나 궁금하다. 죽음을 실제로 접해본 이후에는 사실 그 느낌을 알 수 없기에 어쩌면 이는 미지의 것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의 경우라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이고 많은 경우 죽음에 접해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근본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 전적으로 내 기준에서 보자면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죽는다는 것이 왜 두려운 것일까...

신이 생명을 창조할 때 가능하다면 공들여 만들어 놓은 피조물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고통이라는 것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그 신체에 위해가 가해지면 통증을 느낀다. 그 통증이 극에 달하면 죽음에 이르는 데 죽음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그 전까지의 고통이 차라리 거슬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아무런 고통이 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게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일도 아닌 셈이다.

인간들이 생에 미련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참 각자마다 워낙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기에 딱 부러지게 이런 이유 때문에 생에 미련을 가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존재의 상실인 죽음은 보편적으로는 피하고 싶고 두려운 대상이지만 정신적으로 혹은 이념이나 사상적으로 어느 한계를 넘게 되면 죽음이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점은 특히 제국주의 국가 더 거슬러 올라가 왕권신수주의 하의 국가 체제에서 두드러지는 데 아무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전제군주 등)을 위해 혹은 이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오히려 명예스럽게 비치기까지 하니 죽음이라는 물리적인 단절에 대해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는 역시 정신적인 면에 많이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신념을 위해 혹은 자기가 모시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극히 줄었지만 아직도 아랍권 국가의 종교적 혹은 이념적인 자살이나 일본의 명예를 위한 할복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시대의 흐름과 죽음과는 큰 연관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갑자기 뜬금없이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복잡한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특별한 것은 없다. 살아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일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범인들에게 죽음이란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생명이 존재하는 한 죽음이란 언제나 곁에 머물고 있는 그림자라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적는 것일 뿐이다.

어린 시절 그리고 어느 정도 철이 든 시점에서도 난 죽음을 먼 이야기로 느껴본 적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난 40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어느 새 그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夜想  (0) 2008.03.31
지름신  (4) 2008.03.19
타이밍  (2) 2008.03.13
세월  (0) 2008.03.09
마음이 어리니  (0) 2008.03.05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아니 생각하기 꺼려하고 모른 척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내일도 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점이 아닐까. 시간처럼 불확정적인 존재가 없는 데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일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조차도 없다면 살아가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데 그렇다면 현재는 무엇일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는 데 그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은 아무도 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재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인데도 희망이라는 단어에 모든 것을 걸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미래를 보는 오늘은 힘겹고 지치더라도 참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체 누구의 논리일까? 당연히 내일도 하루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왜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정작 중요한 것은 눈을 뜨고 있는 지금, 오감이 세상을 느끼고 있는 지금인데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고되더라도 참고 견디라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그리고 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 거대한 조직체계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 이상은 아니지만 길게는 100년이라는 시간(시간의 기준은 대체 또 누가 만들어놓은 것인가)을 그 틀에 맞추어야 가며 살아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죽음은 늘 살아있는 존재와 함께 한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의 숙명이고 어느 순간 생이 사가 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야 하는 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을 마치 남의 일인양 멀리하고 있다. 내일 이 시간에도 여전히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애  (3) 2008.02.04
하루...짧은 잡념  (6) 2008.01.23
마가리타 (Margarita) 그리고 추억  (2) 2008.01.13
공부하기  (2) 2008.01.08
WBS를 무시하면..  (2) 2007.12.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