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가지 않고 미뤄두었던 둘레길을 걸었다. 걸은 코스는 두 코스 13구간과 14구간이지만 우선 13구간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14구간의 이야기는 며칠 후로 남겨둔다. 둘레길 걷기가 중반을 넘어서 종반에 이를 수록 뭔가 마음속에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중에라도 다시 걸을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전 구간은 하나씩 차례로 걷지는 않을테니 이번 걸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3구간 송추마을길은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르면 난이도는 '하'이고 전체 거리는 5.3km, 소요시간은 약 2시간 40분이 걸리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위의 기록을 보면 실제보다 거리가 약간 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길의 중간지점에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내가 걸은 길이 지정된 경로가 아닌 조금 구간을 단축하는 길이 몇 군데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고도도 낮은 편이고 평지가 더 많은 구간이라 걷기 수월한 구간이다.


송추마을길은 이전 글에서도 적었지만 충의길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번에 걷다가 중지한 지점에서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아침에 짐을 꾸리며 아이젠을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넣기로 했는데 나중에 14구간을 걸을 때 제법 도움을 받았다. 겨울산에는 아이젠, 스틱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장갑 두 벌 정도와 바람막이 하나, 귀마개, 게이터, 바라클라바, 양말, 약간의 음식과 패딩 정도는 가져 가야 하니 배낭이 클 수밖에 없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여간해서는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는데 겨울에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크기는 딸랑 22리터다. 본격 산행이 아닌 둘레길 걷기인 까닭도 있다. 물론 오늘 저런 것들을 다 들고 간 것은 아니다.


역시나 시작은 밋밋한 도로인지라 이 도로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산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13구간을 걷는 분들은 구파발 역에서 내린 다음 34번이나 704번을 타고 석굴암 입구에서 하차하면 된다. 전체적으로 바람은 불지 않는 날씨여서 가벼운 복장이었지만 그리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 산행은 땀과의 싸움이고 옷갈아입기의 부지런함 정도에 따라 버티느냐 아니냐가 정해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위의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이제 도로를 따라 걷는 일은 별로 없다. 의정부 방향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보니 내가 멀리 오기는 꽤 멀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 안내 이정표의 맨 아래에 오봉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그곳의 이야기는 한참 아래에 나온다. -하지만 뭔가 기대를 할만한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시골의 어느 마을길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둘레길 사진이 전체적으로 우중충해보이는데 역시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눈이라도 없다면 어딜 가나 뭔가 화사한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볼 수 있다면 등산객들의 옷이 색깔 정도일까. 하지만 겨울은 다른 계절이 줄 수 없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송추마을길에는 제법 많은 군부대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주변에 묘지가 많아 군부대에 나름 여러 괴담(?)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도 별별 괴담이 다 있는데 지금 생각나는 건 빨간 부츠 신은 여자아이 이야기 정도다. 아무튼 이 주변의 묘역들은 제법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어느 묘소 근처에는 바로 위에 초소가 있던데 그 초소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는 뭔가 이야기들이 제법 많으리라.

이제야 볼 수 있는 것이 송추마을길 진입문이다. 이제까지 송추마을길이라고 알고 걸어왔던 것은 충의길도 송추마을길도 아닌 애매한 구간이었던 셈이다. 이런 부분은 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워낙 광범위한 지역을 둘레길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으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중간중간의 안내가 좀 더 치밀하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본격적인 송추마을길의 시작이다. 제법 산다운 느낌이 들지만 이 구간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구간이다. 딱히 힘들다거나 곤란한 지점도 없고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나가면 된다. 오늘은 날씨마저 워낙 흐린 탓에 우중충한 겨울의 분위기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게다가 오고 가는 사람도 하나 없어 오후에라도 왔었다면 조금은 음산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제대하신 분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지 싶은데 이 구간 내내 이런 표지들이나 진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주변이 거의 다 군부대기 때문이다. 크레모아는 저렇게 글만 보면 사실 별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격발이 되면 참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무기다. 신교대 교관 시절 저 녀석을 한 번 터뜨려본 적이 있는데 참.. 전쟁이 정말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길은 이런 오솔길과 몇 군데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여름이나 가을날이었으면 제법 화려한 색상들과 마주치며 정겨운 느낌을 듬뿍 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닐까 싶지만 역시 겨울에 만나는 산길이란 지난 시절의 흔적들이 바닥에 짙게 깔린 무언가 다른 시간을 준비하는 잊혀져 가는 시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어서 쓸쓸한 느낌을 걷는 내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겨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왜 나무는 하늘을 보고 자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는데 굳이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에도 그런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수 없이 마주 하는데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다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과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이 사진을 보시면 분노(?)할 예비역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니 진지공사를 어떻게 했길래?"라며 말이다. 군인들에게 봄가을 진지공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그래도 저 정도면 꽤나 열심히 잘 만든거다. 쓸 데도 사실 없는 것을 왜 힘들여 작업을 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소위 FM 즉 Field Manual이다. 원칙이 있어야 그 원칙에 따른 융통성이 생기는 법이다. 당장은 무익한 듯 해보이지만 결정적일 때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곳이 오봉탐방지원센터다. 내가 오늘 이곳을 벼르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둘레길 열쇠고리를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남은 구간을 올해 안에 완주하기는 일단 어려운데다가 탐방센터들이 어쩐 일인지 내가 가는 날마다 문을 닫고 있어서 이곳은 열었을까?라는 호기심도 한몫 했다. 다행히 이곳은 오늘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 서니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 한 분과 묘령의 미모의 처자가 한 분 계셨다. 

나: "스탬프 투어 확인 받으러 왔는데요"

처자: "네~ 다 도셨나요?"

나: "아뇨, 13구간까지만요. 올해 안에 다 못 돌 것 같아서 열쇠고리라도 받으려고요"

아저씨: "에이 하루에 3구간씩 돌면 금방 다 돌텐데 아깝네" 라며 인상 좋은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셨고 처자와 둘만 남은 상황..

처자: "네~ 사진 보여주세요. 어머! 알아보기 쉽게 정리를 잘 해두셨네요"

나: '제가 정리 하나는 잘 하는지라'라고 생각만...

여기까지는 화기애애하고 괜찮았는데 처자분이 스탬프를 찍다가 잉크가 터져 왼손이 푸른색으로 온통 변색이 된 다음에는 좁디 좁은 그 사무실 안에는 적만만 감돌았다. 

나: "저런, 제가 괜히 많이 가져와서 이런 일이"

처자: ...................

이후 괜히 농담도 꺼냈봤지만 대답 없던 처자분... 잉크라 좀 오래 가겠지만 언젠간 지워지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받아온 열쇠고리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북한산둘레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고 온전히 내 걸음으로 얻은 것이기에 그 소중함은 남다르지 싶다. 한 구간만 더 걸으면 탁상시계와도 바꿔준다지만 내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완주할 생각이고 그럴 거라면 완주 기념품이 낫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시작을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부담을 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어서 열쇠고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이었다. 배낭에 걸어두면 그럭저럭 어울리지 싶은데 아직 앞 부분의 칠이 마르지 않아 끈적끈적하다. 며칠 숙성시켜두면 나아지겠지.


오봉탐방지원센터 주변으로는 뭔가 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변이 온통 어수선한 느낌인데 무슨 이주단지라 하던데 이곳에 새로 아파트나 그런 것이 들어서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산 주변으로 자꾸 사람들이 모여 드는 것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갈 수록 산이 산으로 조용히 서 있기도 힘들어진다.


다시 만나게 되는 도로. 여기는 국립공원 주차장이 있는 곳인데 이곳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제법 큼지막하게 만들어 두었다. 역시 평일이어서 한산한 모습이다. 겨울 산행은 확실히 손이 많이 간다. 양손에 든 스틱에 카메라에 장갑까지... 카톡이라도 오면 멈춰서 장갑 벗고 확인하고 해야 하니 부산스럽다. 게다가 옷도 땀이 나면 벗고 추워지면 입고를 꾸준히 반복해야 하니 가장 부지런히 움직여야하는 산행이 겨울산행이 아닐까.


군부대 앞에 저렇게 둘레길이라고 표시를 해 둔 것이 왠지 귀여운 느낌도 든다. 이 지점까지 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더 진행을 해서 다음 14구간에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왼쪽으로 가 버스를 탈 것인지 말이다. 14구간은 난이도가 '상'이다. 북한산둘레길에서 난이도가 '상'인 구간은 단 세 곳뿐이다. 그곳 중의 한 곳이 바로 다음 구간이니 생각을 잘 해야 한다. 특히 겨울산에 과욕은 금물이다. 


멀리 사패산을 바라보면서 걷다 보면 13구간도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 든다. 교통표지판에 의정부, 구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서울의 오른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모양이다. 처음 서울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시작한 둘레길 걷기가 다시 원점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도 해 본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날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맑고 투명하기만 하다. 여기까지 오면 전체적인 기온이 조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점점 산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르막을 따라 조금 걸으면 14구간 산너미길의 시작이다. 두 구간을 모두 걸었지만 이번 포스팅은 13구간만으로 마무리한다.

오늘 걷기는 전반적으로 겨울 산행을 위한 예행연습 같은 느낌으로 준비도 했고 그렇게 움직여보는데 의미를 두었다. 평소 들지 않던 스틱도 들고 교과서대로 사용도 해보고(덕분에 손목이..;) 아이젠도 수시로 채웠다 풀었다 해 주고 배낭도 동계용으로 꾸려서 다녀봤는데 역시 다른 계절에 비해 정말 손이 많이 간다. 가장 문제는 몸에서 흐르는 땀과 바깥의 기온과의 차이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동계 산행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리하지 말 것이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오늘 오르지 못 하면 내일 오르면 그만이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겨울산이다.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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