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데미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사춘기 시절 데미안을 접하고 두 개의 세계와 아프락사스에 대한 생각에 온통 사로 잡혀 지냈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판단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어쩌면 대중적으로 너무 알려져 있는 두 개의 세계, 그리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로 시작하는 문구는 한창 갈등과 사춘기적 방황에 시달리던 내게 마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불빛과 같았다.

결국 당시 나는 나의 감정을 데미안에 투영했는데 문제는 데미안 전반에 펼쳐진 긍정적인 그리고 개혁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시각에 집중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나의 치기를 합리화해버렸다는데 있었다. 내가 이 부정적인 데미안에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무려 십 수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데미안의 후속이라고 해도 좋을 싯다르타를 통해서였다.

학창 시절 이후 나는 다시 이책을 읽지 않았다. 아마도 두려움이 컸기 때문인데 방황과 고독..얼룩진 감성을 합리화하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던 길고도 길었던 시절들이 사실은 내 일방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다시 이책을 읽기는 쉽지가 않다. 싯다르타를 통해 결국 데미안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데미안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의 데미안을 찾는 나로 돌리기 위해서는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무언가 그 상태 그대로 잠시만 놔두고 싶은 마음도 있달까...삶에 있어 어느 정도는 실수와 잘못을 남겨 두고자 하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당분간 그대로 감정을 놓아두는 편이 낫겠다 싶다. 이 또한 나의 치기라면 달리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책을 읽는 이들에게 혹은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떠도는 말로 지레 짐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격이 존재하듯 사람은 그 나름대로 느끼는 감정과 감성이 다르다. 그런데도 자기 스스로는 어딘가로 던져 두고 남들이 말하는(혹은 광고문구에) 단어나 문장에 혹해 자신의 판단을 보류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싶다. 무엇보다 책을 책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고 결과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다. 다만 굳이 내가 이 데미안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온전히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책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없이 들어가자. 비단 책을 읽는 것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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