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내게 매년 어김없이 커다란 기억의 선물 보따리를 안겨 주곤 했다. 올 겨울은 아직 뭔가 크게 기억이 될만한 일은 없지만 1월과 2월이 남아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편에서는 기대도 되고 한편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다.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이고 무채색과 어울리는 사진은 역시 흑백이다. 흑백사진은 언뜻 보면 색이 없는 것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컬러사진보다 더 많은 빛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흑백현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져버리고나서는 좀처럼 흑백 사진을 찍지 않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사진은 흑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분명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컬러인데 왜 흑백이 주는 느낌이 더 강할까 생각을 해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흑백 사진을 찍을 때 좀 더 신경을 쓰는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한다. 흑백사진을 찍을 때는 소위 존 시스템을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해야 한다. 여기는 얼마고 저기는 얼마니 전체적으로 얼마나 나오겠다..이런 계산을 하고 구도를 잡고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조절하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실 흑백 사진을 찍는 일은 꽤나 고된 작업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그냥 RAW모드로 차라락 찍어 버리고 집에 와서 컴퓨터로 수정을 하면 되니 예전의 그런 고됨이 없어 편리할지는 몰라도 왠지 사진에 영혼이 없는 느낌이 든다. 막말로 쨍하고 화려한 사진은 많지만 마음에 와 닿는 사진은 갈 수록 적어진다는 말이다. 사진을 마우스로 이리저리 클릭해서 만들어낸다는 게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것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계속 제자리에 앉아서 '디지털 세상은 반갑지 않아. 아날로그가 제일이야'라고 외쳐보아야 그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아날로그를 찾아야 그것이 제대로 아날로그를 즐기는 법이다. 나는 여태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변화된 세상이 낭만이 없네 하며 팔짱만 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는 그저 과거에 매여 사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영혼이 있네 없네 하는 것도 같은 속좁음이다. 그래도 옛것이 좋아라고 하기보다 좋은 옛것을 요즘의 것과 어울리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흑백 사진은 인화물을 받아 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뭔가 쿵하고 내려 앉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 모든 느낌들이 나 혼자만 느끼는 그런 것이라 해도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현상된 슬라이드를 라이트박스에 비추어 보는 일보다 흑백 사진이 인화된 인화지가 더 반가운 것이 내 사진 생활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지금도 방 한 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필름 보관함과 인화된 사진 앨범을 열어보면 그렇게 오래된 내 추억들이 하나 둘 현실처럼 느껴지곤 한다. 분명 2차원의 종이인데도 말이다.

디지털로 넘어온 지금도 흑백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하지만 아직 디지털 카메라로 적극적으로 흑백 사진을 만들어본 적은 없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온전히 흑백만으로 찍어볼 생각이다. '디지털이니 현상도 안 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없어!'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래도 이 녀석들을 가지고 이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를 연구해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RAW모드에도 흑백 모드가 있다. 단순히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흑백으로 이미지를 잡아내는 것인데 아직 이 모드는 사용해본 적이 없다.

디지털로도 이전의 필름 카메라가 만들어낸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만약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필름 카메라로 만들어냈던 그 느낌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과거가 아름답고 추억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현재에는 그런 기억을 만들려 하지 않는 것 역시 내가 변한 것일뿐이다. 바라봐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지난 기억이 아니라 지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오늘의 하늘이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Ilford PanF, LS-40




온라인이 일상 생활이 되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도 많이 달라졌다. 한편에서 보면 온라인을 통해 좀 더 많은 그리고 적극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만 보면 오히려 이전의 아나로그 시대보다 더 각박해진 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같다. 아나로그 시대에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일단 해결을 하려면 만나야 했었으니 서로간에 해묵은 감정이나 좋은 감정들도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풀어나갈 수 있었다. 즉 오해를 만들만한 소지는 그만큼 적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온라인 시대 특히 요즘같이 메신저나 블로그가 일상화된 시대에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만 그만큼 사람을 잊기도 쉬워졌다. 얼굴을 마주하고 무언가를 논의하기보다는 메신저 상에 보이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평면 문자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해야 하고 익명성을 기반으로한 게시판의 글들은 아예 상대방의 인격을 배제하고 들어가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관계는 즉흥적이고 또 일방적이다. 누군가와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싶으면 메신저에서 삭제해버리고 차단해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정리가 된다. 애초부터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오늘날의 우리네의 모습은 메신저에 보이는 이모티콘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이 나를 차단해버린 줄도 모른다. 행여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나 역시 그 사람의 아이디를 내 메신저에서 지워버리며 그만이다.

만나서 할 이야기도 이렇게 메신저나 이메일이 대체해버리고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또 다른 자아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보니 과연 인간성이라는 것을 언급할 가치조차 있을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주먹다짐을 하더라도 오해를 풀고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냥 오해를 해소할 여지도 없이 차단을 해버리는 것이 나은 것일까?

온라인의 장점은 분명 상당히 크고 대단하지만 그 부작용 역시 만만치가 않다. 이러다가 미래의 인간의 모습은 긴 손가락과 큰 눈만 가진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실, 추억의 거리를 다시 걷다  (2) 2009.02.02
이런 아르바이트는 어떠세요?  (6) 2009.01.24
좋은 상사란?  (4) 2009.01.22
500기가 하드를 구입하다  (8) 2009.01.21
의사소통이라는 것  (0) 2009.01.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