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제법 오래 전 재개발로 동네 전체가 허물어지던 어느 동네를 찾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삶의 기반을 두고 있던 집이 헐린다는 느낌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우리네 삶 속에서 제법 적지 않게 일어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공간이 허물어지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혹은 정신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이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그 동네를 걸으며 그 사람들이 혹은 그 동네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얼마나 나의 오만스러움과 착각이 당시의 나를 감싸고 있었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려 온다. 흔히 재개발 지역, 혹은 공사장의 인부들의 모습, 시장의 상인 등을 프레임에 담으며 삶의 모습을 느끼고 싶다곤 하지만 그것은 사진을 찍는 이의 교만스러움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네들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오욕칠정의 모든 감정을 함께 겪지 않고서 어느 날 카메라 하나 달랑 매고 그 동네를 한 번 휙 둘러보고 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사진가는 겸손해야 하고 피사체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린 시절의 내 사진..그리고 지금의 내 사진 역시 피사체와 너무나 동떨어진 그런 먼 거리의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파인더 안을 들여다봤을 때 그런 감정이 느껴진다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 발 더 다가설 필요가 있다.


Contax Aria, Distagon 35mm f/2.8, LS-40 필름 스캔


한창 사진에 푹 빠져 있을 때에는 오로지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스캔 작업을 하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였을 정도였다. 오늘 문득 지난 스캔 파일 폴더를 뒤적이다 보니 올해 들어서는 한 장의 사진다운 사진을 찍지 못했다. 2008이라고 적힌 폴더는 텅 비어 있고...한참을 보관함에 넣어 둔 카메라는 오히려 낯설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면 사진을 가장 열심히 찍던 시절이 일도 가장 열심히 했고 마음도 가장 편안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사진이라는 것은 사진가 본인의 감정이 그대로 이미지에 나타나기 때문에 정신이 멀쩡하지 않으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직업 사진가들의 고뇌가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간다. 후배 녀석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어쩌면 다시 사진을 내 인생의 중심으로 끌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선뜻 응했다.

보관함에 고이 모셔져 있는 카메라를 들어본다. 전원을 넣어보니 여전하다. 그동안 얼마나 쓸쓸했을까...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로 기기변경을 한 이후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슬라이드 필름북에 더 이상 담을 슬라이드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출사를 나가고 보통 다음날 정도에 충무로에 들러 필름을 맡기고 근처의 카메라샵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죠. 한 두 시간 정도 지나 현상이 완료되면 라이트박스와 루뻬를 이용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체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됩니다. PC를 켜고 스캔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이죠. 제가 애용했던 LS-40은 롤 단위 스캐닝은 불가능한 기종으로 보통 5-6장 단위로 잘린 필름을 넣고 스캔을 해야 했습니다. 이게 어찌 보면 참 지루한 과정입니다. 스캔을 하는 동안은 다른 작업을 하기는 PC가 버티지를 못하기 때문에 스캔을 시작하고 나면 사진 관련 서적을 뒤적이는 게 보통이었죠.

스캔이 끝나면 날짜와 사용한 필름, 바디와 렌즈별로 별도의 폴더를 만들어둡니다. 좀 더 꼼꼼한 분들은 촬영지나 당시의 노출 상황 같은 것들도 같이 기록하지만 제 경우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스캔 작업이 완료되고 폴더별 정리가 끝나면 인화를 할 사진들을 고르고 그냥 보관만할 사진들을 고릅니다. “야, 이거 좋은데..”라고 생각하는 필름들은 다시 주섬주섬 챙겨서 충무로로 가 인화를 하지만 대부분은 온라인 사진관을 통해 인화를 합니다.

스캔 작업이 끝난 필름은 하나하나 잘라서 마운트를 한 후 슬라이드북에 보관합니다. 이후 인화된 사진이 도착하면 이것역시 바인더에 보관을 하게 됩니다. 보통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 대충 이 정도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디지털로 전향(?)을 한 이후에는 이런 과정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촬영 습관이 바뀌더군요. 슬라이드를 사용할 때는 솔직히 롤 당 만원이 넘는 금액이 부담스러워서 브라케팅은 좀처럼 시도를 못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쓰게 되니 브라케팅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덕분에 노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진 점은 장점이네요.

게다가 촬영일이나 노출 정보와 같은 데이터들이 메타데이터로 파일에 모두 포함되니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할 일이 엄청나게 줄어든 셈입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사진을 조금 오래해 온 사람들이 느끼는 손맛..이라는 것이죠.

필름은 현상이 되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매 순간순간이 긴장과 고민의 시간이고 현상된 필름을 루뻬로 들여다볼 때 느끼는 그 성취감(?)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니 허전한 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화를 마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적당하게 빛이 바래버린... 그래서 가끔 바인더를 뒤적일 때 빠지곤 하는 애틋한 감상을 느낄 수 없게 된 것도 아날로그에 익숙한 사진가들의 마음을 허전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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