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의 많은 봉우리들 중에 유독 나와 인연이 있는 봉우리를 고르라면 '족두리봉'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예전 북한산둘레길을 걸을 때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겠지만 그 이후에도 몇번을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 그 인연의 시작을 확인해보고자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족두리봉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는 크게 2-3개 정도가 되는데 이번에 고른 등산로는 둘레길 중 하나인 구름정원길을 지나는 길이다. 이곳에서 출발하게 되면 약간 난이도가 높아지는 단점은 있지만 내게 있어서는 오늘만은 이길을 가야한다는 묘한 마음의 부담을 안고 출발했다. 주말이어서 상당히 많은 이들이 북한산을 찾았는데 사람이 없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의 시작은 구름정원길이다. 벌써 이곳을 걸었던 것이 1년도 넘은 일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곳인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시간은 흘러도 자연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구나.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짧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이 표지판은 작년과 약간 달라졌다. 전에는 머리조심이라고 적혀 있어서 어쩐지 재미도 있었는데 이번 표지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저 그림을 바라보다가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내 산행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인데 아마도 사진을 찍느라 멈추는 일이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원만한 길을 조금 걷다보면 이 지점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에 보이는 탐방객 확인을 위한 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물론 둘레길을 걷는 것도 산행이지만 걷기와 오르기는 묘한 뉘앙스가 분명 존재하기는 한다. 아무튼 이제 1년이 지난 약속을 지키려 이곳에 왔다. 늘 닿을 것만 같으면서 좀처럼 닿지 않았던 인연에 내가 먼저 다가서기로 한다.


둘레길 걷기와 다르다는 것은 초입에서부터 적나라해진다. 족두리봉에 오르는 길을 이곳으로 정했을 경우에는 오르는 내내 이런 모양의 길을 만나게 된다. 북한산의 특징인 바위를 아주 지겹도록 볼 수 있는데 등산화의 선정에 조금은 주의가 필요하지 싶다. 맑은 날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습기가 많은 날에 이 루트를 탈 경우 비브람창은 다소 미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사람 나름이기는 하다)


한여름이었다면 제법 숨이 벅찼을 길을 따갑지 않은 한낮의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올라본다. 내 산행이란 급하지도 않고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물론 정상에 다다르면 잠깐은 기쁘겠지만 몸과 마음이 힘들다면 좋은 산행이라 부르기 어렵다. 일상에서 그렇게 목표달성에 치이며 살아가면서 모처럼 만난 자연에조차 그런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이런 곳에 사람이 쌓은 돌벽이 있을까. 한참을 멈추고 바라본다. 그러고보면 자연이라 해도 어딘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이리 재단하고 저리 재단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남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자연과 어설픈 인간의 흔적이 아닐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겨본다.


이쪽 등산로는 흙을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돌로 만들어진 길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강하다. 흙이 주는 따스함보다는 '왜 굳이 이리 올라오느냐'며 채근하는 느낌이다. 돌길은 흙길에 비해 체력소모가 확실히 많고 계절의 뜨거움이나 차가움이 그대로 몸에 전해지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나마 습기가 없어 미끄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 뿌리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얼마나 많은 등산화가 이 뿌리를 밟고 지나갔을까. 가파른 경사로의 이어짐 속에 바닥 한 번 내려다 보기 어려운 길에 이렇게 뿌리는 묵묵히 그 존재를 남기고 있었다. 사람이 걷는 길을 막아서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가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그 나무를 에둘러 가는 것이 맞을까...


주말이어서 제법 많은 이들이 둘레길에 있었지만 족두리봉으로 넘어가는 이쪽 등산로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환갑이 훨씬 넘은 어르신들이 성큼성큼 걷는 모습을 보면 내 체력이 영 부실하다는 느낌은 족두리봉을 오르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앉아서 씨름해야 하는 직장생활 속에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산은 꾸준히 와야지 싶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니 제법 험해보이는데 실제로도 이렇다. 가끔은 네발(?)로 돌에 붙어서 올라가기도 해야 한다. 등산화가 미끄러지면 참 낭패인 구간이 곳곳에 있으니 이쪽으로 족두리봉을 오르시려는 분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신발 종류에 관계없이 잘 오르는 분들은 잘 오른다. 나처럼 기술보다는 장비에 의존해야 하는 초보등산객은 바위에 잘 붙는 신발은 좀 더 유리하다는 말이다.


족두리봉은 불광역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올라가면 서울의 한 구석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 아래 수 많은 아파트들과 건물들 안에서 수 많은 인생들의 희로애락이 펼쳐지고 있겠지만 이렇게 산에 올라 바라보면 그깟 인생이 참 뭐가 대단한가 싶다. 결국은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잠시 떠나있는 지금만큼은 도시 이야기는 완전히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은 다행이지만 이쪽도 만만치는 않다. 그래도 조금은 벅찬 길로 산을 오르는 느낌은 꽤나 즐겁다. 위험요소에 대한 준비만 잘 한다면 천천히 오르면 아주 어렵지는 않으니 너무 겁내지는 않아도 된다. 다만 계절이 서서히 겨울에 가까워지는 요즘이기 때문에 체온 유지를 위한 겉옷과 비상식량 등은 이전보다는 좀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한참 앉아서 쉬던 곳인데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다면 제법 무서울만한 장소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면 꽤 긴장했을 것같다. 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바닥 보기도 힘들텐데..라는 생각에 한동안 앉아 이곳저곳의 지형들을 살폈다. 멀리 바라보니 이제까지 올라온 길이 보인다. 능선길을 따라 이렇게 올라왔구나라는 생각 그리고 사람들이 참 길을 잘도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바위와 바위로 이어진 길이 등장한다. 이쪽 코스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가파른 곳이라는 게 전부였던지라 오늘은 참 바위를 질리게도 오르는구나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을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북한산은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여름의 흔적과 조금씩 다가오는 겨울의 징조가 어울릴듯 어울리지 않을듯 묘하게 얽히곤 했다.


오르막이 멈추고 난 후 나타난 능선길은 이번 산행의 절반이 끝나가는구나라는 조금은 안도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늦가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가워 그늘만 보이면 조금이라도 그 그늘에 의지해 쉬곤 했다. 산행은 마음 맞는 이와 같이 가는 것이 제일 좋고 그렇지 않다면 혼자서 가는 편이 낫다. 개인별로 체력이 다르고 산행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상인 족두리봉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해발 370미터면 사실 오르기 크게 어렵지 않은 동네 뒷산(?) 정도일 수도 있는 높이지만 초보등산객의 입장에서는 참 높고 멀기만 한 등산이 아니었나 싶다. 나름 천천히 오른다고 시작한 등산이지만 실제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천천히지 다른 사람이 보기엔 빠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족두리봉 정상에는 그다지 경치와 어울리지 않는 송신기 비슷한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달갑지 않은 이물질일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인연이라면 인연인 족두리봉과의 만남은 일단 끝이 났다. 그동안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내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 바로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그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저 아래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집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굳이 알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저렇게 어우러진 모습 자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진들은 이전 사진들과는 아마 색감이 다르게 느껴지지 싶은데 라이트룸에서 VSCO 필터를 적용한 덕분이다. 어떤 필터가 적용된 것인지 짐작이 가는 분이 있을까? 100VS라는 이름이 낯익다면 아마도 스크롤을 다시 위로 올라 한참 사진을 보지 않을까? 나 역시 필터를 적용시키고 나서 한참을 화면을 바라봤는데 아주 오래 전.. 이제는 추억의 이름이 된 Kodak 100VS를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Panasonic LX-7, Lightroom + VSCO Kodak 100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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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은 조금 깁니다. ^^-

사실 예정에 없던 둘레길이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오늘은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섰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평소와 같은 준비를 하고 평소와 같은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는 달랐다. 같은 준비를 해도 다다를 수 있는 곳은 이렇게나 다른 법이다.


둘레길 8구간은 아주 예쁜 이름인 "구름정원길"이다. 하지만 오늘의 둘레길 걷기는 내가 아침에 하고 싶었던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보자..라는 계획을 좌절시킬 정도였으니..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8구간은 총 5.2Km로 중급 코스다.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로 국립공원은 안내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버스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동거리와 시간은 더 늘어난다.

중간에 앱이 저절로 멈춰버리는 바람에 측정이 애매하게 됐다. 평소 멀쩡하던 앱이 정신이 나가다니..아무튼 불광역 2번 출구로 나가 왼쪽으로 돌아 죽 직진하면 이전에 마무리했던 7구간의 종점을 볼 수 있고 그 건너편이 바로 8구간이다. 그런데 이 8구간 시작점을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다. 표지판도 애매하거나 없어서 시작부터 조금 헤맸는데..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앱이 멈춘 지점부터 다시 기록을 했다. 총 이동거리는 8Km이고 소요시간은 3시간 58분이다. 차이가 나도 좀 심하게 나는데 위 2개의 그림을 조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을 찾으실 수 있을테고 그게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아무튼 오늘은 2대의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두 카메라의 차이를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물론 비교하기는 애매하지만) 광각과 매크로를 보조할 수 있는 카메라가 한 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래 사진에서 두 카메라의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싶다.

구름정원길로 접어들기 직전에는 이렇게 안내도가 붙어있다. 주변에 먹을거리들이 제법 많은 소위 먹자골목이라는데 워낙 먹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지라 그냥 그려려니 하고 안내도가 잘 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후의 걷기는 거짓말 조금 보태어 GPS를 가동한 지도가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구간이었다. (사실은 내가 정신줄을 놓은 게 제일 문제긴 했다)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한 분이 지키시는 안내소를 지나 공원길로 올라가면 된다. 가는 동안 '여기가 둘레길이다', '아니다 저기가 둘레길이다' 라고 외치는 표지판들이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가 들릴텐데 꿋꿋하게 외면하고 왼쪽으로 진행하도록 하자. 


민가를 몇 채 지나 익숙한 계단을 넘으면 8구간의 시작점에 다다르게 된다. 오늘은 생각할 거리를 한 뭉치 들고왔으니 평소와는 달리 아주 천천히 걸을 생각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차근차근 내 안에 엉킨 것들이 있으면 풀어버리고 아주 단순해져서 돌아올 생각이다. (아니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문이다. 앞서 전체 안내표지판도 그렇고 이번 구간은 꽤나 친절한 안내가 되어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물론 여기까지 잘 왔다면 이 마음은 더 컸으리라 싶지만 잠시 앉아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걷기로 했다. 평일이라 역시 사람은 거의 없다. 등산로도 아닌데 사람이 많을리가 없다. 사람이 없어야 맞았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낡은 집을 한참 바라본다. 저곳에도 예전에는 사람이 살고 그 안에서 오욕칠정이 오고갔을텐데 이제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집으로부터 혼을 빼앗아가는 것과 같다. 조금 이른 아침이라 그래도 괜찮았지만 늦은 저녁에 보면 제법 공포분위기도 나지 싶다.


뭔가 사진 색감이 확 달라졌다고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니콘의 전형적인 느낌인데 어쩐지 이 느낌을 평생 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이전의 사진은 모두 LX5로 찍은 사진이다. 약간 캐논의 느낌도 들지만 파나소닉의 화사함은 캐논과는 또 다른 맛이 난다. 캐논은 나와는 워낙 상극인 메이커였는데 파나소닉은 제법 괜찮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해보면 평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무나 당연스레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쯤 바꿔본다면 이제까지의 생활과는 또 다른 생활을 해볼 수 있다. 혹은 기존의 것에 익숙함이라는 일종의 고집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만은 않다.


예전에는 '논쟁'을 즐겨 했었다. 어떻게든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다. 내가 100% 옳아 상대가 수긍을 해야 만족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과연 상대가 완전히 내 생각에 동의를 했을까? 아니지 싶다. 앞에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도 자신의 의견이 무너진 것에 대한 '반감'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남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상대에게 이긴다한들 그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차라리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만 못 하게 된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음속에서 울컥하며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분명히 내가 맞다는 생각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전하는 방법이 꼭 논쟁이나 마치 수업시간에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상대방보다 내가 우월한양 행동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의 지난 날들을 보면 실제로 그래왔었다. 오히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써야했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틀림과 다름이라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 단어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다. 한장은 내가 바닥에 붙다시피 하고 찍었고 한장은 평소와 다름 없는 내가 선 높이에서 찍었다.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제법 많은 것들이 다르다. 같은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한다면 상대의 눈높이로 내가 맞춰야 한다. 다가서지 않고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해봐야 손해는 결국 내게 돌아온다. 땅바닥까지 내려가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이미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8구간은 전반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대단히 멋진 풍광을 지닌 구간이다. 코스 자체가 구불구불하거나 계단이 많은 편도 아니어서 한가로이 생각을 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구름정원이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리는 곳이지 싶다. 가을임에도 마치 한여름처럼 무척이나 더웠던 날씨가 잠깐잠깐 길을 멈추게 했지만 그 멈춤에도 여유가 있어 평화로웠달까


이길의 이름은 "스카이워크"란다. 조금 뜬금이 없다. 둘레길이라는 우리말로 예쁜 이름을 지어 놓고 갑자기 이길의 이름은 무려 스카이워크라니(사실 데크라는 말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외국인도 함께 걷자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우리말로 무언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영어로 표기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둘레길을 걷다가 갑자기 스타워즈를 생각하게 되다니... 아무튼 이곳에 포토포인트가 있으니 도장 모으는 분들은 셀카 한 방 찍으시고..


처음 보는 표지판인데 누군가 자꾸 이 나무가지에 머리를 부딪혔던 모양이다. 가지가 조금 낮게 굽어 있어 이야기라도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여지없이 부딪힐만한 위치에 있다. '뭐야 이게 여기에 머리를 왜 부딪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한편 나무입장에서는 제법 억울한 일인데 자기는 그저 가만히 팔을 뻗고 있을 뿐인데 이놈의 인간들이 자꾸 머리로 들이받으니 난처할 노릇이다. 그래놓고 만물의 영장이라니..


느긋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말 이제까지 돌아본 둘레길 중에 가장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걷고 있을 무렵 나타난 이정표. '족두리봉이라..이름 참 특이하네..' 지난 구간을 돌 때 들은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여기를 지칭한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북한산에 올라야겠다는 충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800미터라..얼마 안 되는데.. 지금은 별로 힘들지도 않고.. 흠... ......


진입을 하고나면 길을 그리 험하지 않다. 이제까지 온 길보다 갑자기 경사가 급해져서 조금 당황되기도 하지만 등산장비를 갖추고 있다면 큰 무리는 없을 정도다. 북한산은 몇 년 전에는 칼바위능선 쪽으로 거의 일주일마다 올랐던 터라 큰 부담은 없었다. 문제라면 가져온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정도인데 오늘도 늘 둘레길에 올 때처럼 파워에이드 한 병이 전부였다.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고 그냥 둘레길을 걷는다면 점심 먹을 때쯤은 끝날텐데 북한산을 아예 올라간다면 상황은 조금 다를텐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800미터 정도야...'라고 착각을 해버렸다.


가면 갈 수록 길이 이 모양이다. 카메라 두 대가 일단 걸리적거리기 시작한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한 대는 입고시킬 각오를 해야 한다. 튼튼한 하체만 믿기에는 완전히 낫지 않는 발도 슬슬 신경이 쓰인다. 무엇보다 먹을 게 없는데...'대청봉도 김밥 한 줄하고 파워에이드 한 통으로 갔었는데...' 괜찮겠지?


역시 올라오니 좋다. 경치 보이는게 일단 다르다. 날이 워낙 맑아서 제법 멀리 볼 수 있다. 바람이 불지 않고 햇살이 제법 따갑지만 그래도 이런 시원시원한 맛이 산에 오르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제법 많은 분들이 코스를 오르고 있었다. 

내 실수 중의 하나는 만약 등산을 계획했다면 미리 코스를 숙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나중에서야 족두리봉이 암벽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사실 이 코스는 능선 쪽이 아니라면 꽤나 위험한 코스다. 실제 인명사고도 종종 나는 곳이다. 둘레길 정도는 모를까 충동적으로 등산을 결심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한다.


어지간히 헉헉거리고 올라가니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인다. 사방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파워에이드는 이미 반을 비워가고 있었고 지구력이라면 제법 버티는 나로서도 생각지도 않던 등산은 당연히 힘겨운 일이었다. 처음엔 이 바위가 족두리 모양인가 생각을 했지만 이리보고 저리봐도 이건 족두리가 아니라...흠.. 아무튼.. 사방을 좀 더 둘러보고 GPS맵을 켜서 위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족두리봉 능선코스는 이쪽이었다. 까마득하다. 산길에서 800미터면 그냥 800미터가 아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 과욕을 부리기에는 우유 한 잔 먹은 아침식사로는 분명히 곤란에 빠지지 싶었다. 못 가는게 아니라 안 가는거다..라고 나름 합리화를 하고 하산하기로 했다. 아쉽긴 했지만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평지로 내려오니 살 것 같았다. 산이 있다 해서 그냥 올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둘레길을 걷는데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정상에 오를 생각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는 되지 않는다. 아무튼 괜한 객기를 부리는 바람에 체력소모도 컸고 음료수 소모도 컸다. 사실 앞으로 갈 길이 제법 남았는데 조금 걱정이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꽃인데 사실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다. 접사로 찍고 보니 이렇게 다른 모습이다. 무엇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서운 것은 없는데 이것을 떨치려면 또 다른 습관을 들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이제껏 해오던 방법 혹은 시선과는 반대의 방법에 익숙해지거나 시점에 익숙해지면 차츰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은 사라진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도하지 않았기에 바꾸지 못할 뿐.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그길을 갈 것이냐 말 것이냐는 사람이 정할 따름이다. 당장 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고 다시는 그길을 가지 못할 거라 체념할 필요도 없다. 길은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이란 '다시 갈 수 있는 길'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어느 길이 바른 길이냐 하는 것도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길은 없고 절대적으로 그른 길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길을 걷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걷느냐에 달려 있다. 칼도 주방에서 쓰면 요리용 도구지만 전쟁에서 쓰면 살인무기가 된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굳어지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석(?)이 예사롭지 않다. 쓰인 글을 보니 중세국어인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무엇을 위해 이렇게 놓여 있는 것일까 한참 바라본다. 사실 뜻은 별 것이 없다. 8구간을 돌다보면 이렇게 무언가 적힌 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묘지를 지키는 돌인형이 누워있는 것도 볼 수 있고 무덤도 제법 많다. 과거의 기록들이 꽤 많이 보존된 구간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탐방객 수를 조사하는 개찰구(?)를 또 지난다. 아까 지나왔는데 왜 또 있을까..희한하다 싶었다. 사실 그때 주위를 둘러보고 상황파악을 했었어야 하는데 문득 "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숫자 늘려봐요"라는 말이 생각이 나면서 혼자 웃으며 그냥 지나쳤다. 아...나는 대체 왜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여기서부터 한동안 사진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위 사진에도 보이지만 뭔가 길이 이제까지 온 길과 달라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느라 사진을 찍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경고는 하나 더 있었다.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안내도가 보이는데 전형적인 등반코스를 그려놓고 있는 안내도다.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똑바로 적혀있다. 나는 그 안내판 앞에 한참을 서서 '어라. 진흥왕순수비가 저기 있네. 저게 북한산비구나. 조금만 더 가면 볼 수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음료수가 10분의 1정도 남은 시점에 어느 넓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였다. 가도가도 "북한산둘레길"을 알리는 네모난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이상해서 대체 여기가 어딘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지도를 켜고 현위치가 나타나는 순간 참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향로봉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산이 나를 부르나 싶었다. 한 번은 내 의지로 올랐고 한 번은 무의식으로 올랐다. 물론 두 번 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묘한 날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끝까지 가주마..라고 다짐을 하고 다시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피로도도 제법 올라가있고 배도 제법 고파왔다. 


이렇게 큼직한 이정표가 있는데 왜 이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까..생각이 많으면 병이다 싶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정신을 놓지는 않았는데..여기서 향로봉은 1.8Km다. 올라가려고 한다면 작정을 해야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한 번 족두리봉에서 실패를 한 다음인지라 또 시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몸이 저절로 올라간 것은 대체 왜인지...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조금 더 걷다보면 개울이 나온다. 이제는 제법 차가운 물이다. ND필터가 아쉬웠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임기응변으로 물줄기를 담아봤다. 이제 거의 코스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든다. 두 번의 삽질(?)이 없었으면 지금 쯤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나는 여전히 둘레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힘은 많이 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들어오는 햇살이 비추는 공간에 이름모를 꽃들이 또 그렇게 피어있었다. 해가 들어와 저렇게 저 부분만 밝게 비추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텐데 저렇게 빛이 들어오니 걸음을 멈추게 된다. 길은 그리고 산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 소리를 듣느냐 아니면 지나치느냐에 따라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이 달라진다. 밖으로 나가 세상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완연한 가을 느낌의 산이 보이고 길이 보이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고 또 걸어가고 있다. 이 순간에는 그것이 그냥 그 자체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여러 생각도 멈추고 그저 바라보고 느끼는 순간이다. 


어찌되었건 파란만장한 8구간은 마무리되었다. 남들은 편하게 즐기며 걷는다는 이 구간을 나는 꽤나 고생아닌 고생을 하며 걸었다. 예상보다 먼 거리를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걷게 되었는데 이번 가을에 다시 이 구간을 걸을 리는 없을테니 그래도 제법 괜찮은 기억으로 남을 걷기였다. 문을 나가 왼편 경사로에 짐을 풀고 남은 음료수를 모두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마 배고픔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지만 잘 안 먹는 고집은 좀처럼 꺾이질 않으니 문제는 문제다.

이곳을 나가 왼편으로 죽 걸어나가면 큰 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연신내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걸어가도 되지만 20분 정도 예상해야 하니 버스를 타는 편이 낫다. 돌이켜보면 오늘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 것은 합정역에서 6호선을 타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불광역으로 향하는 열차라고 덥썩 타고 나서 한창 미드 '그림'을 보고 있었는데 '다음 역은 삼각지, 삼각지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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