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북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대로 두다가는 눈 덮인 겨울산을 더 보기 힘들 것 같아 없는 시간 쪼개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 다녀온 구간은 17구간과 18구간으로 드디어 경기도에서 다시 서울로 접어드는 나름 의미가 있는 걸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제법 맑고 하늘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던 데다가 며칠 새 눈이 제법 왔으니 설산을 보기에는 제격이다 싶었다. 물론 마음은 백운대에 가 있었지만 우선은 이 걸음을 마무리해야 한다.


17구간 다락원길은 지하철 1호선 망월사 역에서 시작한다. 이 구간은 이전 글에서 적은 지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형식이어서 따로 출발점이 있진 않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본격적인 둘레길 코스에 진입하는 동안 길가에 쌓인 눈은 정말 대단해서 인도는 거의 치워지지 않아 차도로 걸어야 했다. 멀리 도봉산 자락이 손짓해 부른다.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의 네 번째 산인 도봉산. 둘레길 완주가 마무리되면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다.


멍하니 산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에 시커먼 녀석이 있어 깜짝 놀랐다. 대충 3-4미터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은데 까마귀가 그렇게 큰 줄을 몰랐다. 아니면 이 녀석만 유달리 발육상태가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폼이 대단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는 흉조로 여겨지지만 길조로 여기는 나라도 있다. 아마도 이름이 좀 이상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머리도 좋다고 한다. 검은색에 대한 어딘가 모를 타부 의식이 아닐까 싶다.


이 구간은 사실 이제까지 걸어온 여러 구간들 중에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구간으로 꼽을만하다. 뭐랄까 특징이 없는 길이랄까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 구간을 걸으며 아쉬웠던 마음은 18구간인 도봉옛길에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아무든 이 근처에는 군 부대가 여럿 있는데 오늘은 사격일인지 총소리가 제벱 요란했다. 총소리라면 군 시절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다.


이제 제대로 된 산길에 접어든다. 아이젠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일단 그냥 가보기로 한다. 하지만 겨울산에는 무조건 아이젠과 등산스틱(마운틴 폴)을 이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눈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스틱은 미리 길을 짚어보는 용도로 유용하다. 아이젠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눈이나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번거로워도 채우고 출발하자. 가끔 보면 산을 잘 탄다는 호기에 혹은 몰라서 아이젠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젠 없이 눈길을 성큼성큼 달려간다고 해서 누가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진 않는다.


사방이 온통 눈이고 나무다.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풍경이다.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은 게 오늘은 좀 실수였다. 햇빛이 제법 강해서 눈에서 반사되는 빛이 상당히 강렬했다. 할 수 없이 실눈을 뜨고 걸어가곤 했는데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참 우스웠을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근방의 눈은 정말 많이 쌓여있었다. 사람 한 명정도 지나갈 정도의 길만 그나마 눈이 적고 그 주변은 발을 집어 넣으면 발목을 쉽게 넘을 정도였다.


요 며칠새 내린 눈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눈 쌓인 나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눈 무게가 상당한 까닭인데 나무는 그저 허리를 숙여 눈을 온몸으로 버텨낼 뿐 아무 불평도 없이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눈이 내린 이후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 길이어서 정말 원없이 눈을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대충 이 정도로 발이 푹 들어가는데 위에서 보니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발목 위로 훌쩍 올라온다. 어림짐작으로 20Cm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둘레길 시리즈를 쓰면서 내 몸이 출연하기는 처음이다. 전신 사진도 있긴 하지만 눈이 피로해질 분들이 상당수 되지 않을까 싶어 차마 그 사진을 올리지는 못 하겠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려둔 게 있긴 한데.. 아무튼...


대체로 무난한 산책로 정도의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다. 맨 아래에 트래킹 기록을 붙여 두었는데 17, 18구간을 참 천천히 걸었음에도 2시간 30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니 두 구간은 걷기 편한 길. 산책하기 좋은 길이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발 아래에서 들여오는 뽀드득 하는 눈 밟히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어딜 가나 눈이고 나무다. 볼 수 있는 색은 단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참 매력적이다. 도시로 돌아오면 정말 눈이 혼란스러울 정도의 많은 색들에 눈이 시달려야 하는데 눈 덮인 산을 걸으면 몇 개 안 되는 색밖에 볼 수 없고 그 색들에 푹 빠지게 되니 말이다. 산은 그렇게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우리 인간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길가로 조금 나오면 다락원 캠프장이 보인다. 참 좋은 지역에 캠프장이 있다 싶은데 누가 와서 캠핑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YMCA에 대해 생각나는 건 야구단 주제로 한 영화밖에 없기도 하고...다락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을 가던 이들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이 다락원길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경기도와 서울에 걸쳐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인데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만든다.


자, 이제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로 접어 든다. 북한산둘레길을 걸어보자고 생각한 이래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로 나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거리 상으로야 얼마 되지 않지만 이 길을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제법 오래 걸렸다. 오늘 17구간과 18구간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남은 구간은 단 세 구간뿐.. 19,20구간은 서울의 동쪽을 그리고 마지막 우이령길은 출발점을 어디로 잡건 경기도로 한 번 더 나가야 한다.


얼마 걷지 않았다 싶은데 17구간이 끝나고 18구간인 도봉옛길이다. 이 구간은 정말 괜찮다. 산을 오르는 듯한 재미도 있고 풍광도 근사하다. 그리고 이 구간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도봉산의 주등산로와 만날 수 있기도 하다. 평일임에도 이 구간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아마도 도봉산으로 향하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구간은 사찰이 여러 곳 있다. 자세히 들여다볼까 하다가 뭐랄까 그 화려함에 조금은 기가 죽어 글로 적지는 않기로 한다.


사람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 이 계단에 누군가 지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길이 나지는 않았을 것. 어디가 계단의 시작이고 끝인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 같은데 누군가 부지런히 걷고 또 걸으며 길이 만들어진다. 눈 덮인 산은 이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물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해 눈을 헤치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유를 부릴 틈은 없겠지만 말이다.


멀리 보이는 정상이 자운봉일까. 나는 아직도 산을 멀리서 보고 저기가 무슨 봉우리고 무슨 능선이고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 이름을 알고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기도 하다. 아마 저 봉우리들을 몇 번 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이름도 알게 되고 길도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어색해보이지만 그래도 꽤 멋진 풍경이다. 저 정상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먼 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정상 근처에 뭐가 뭍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진을 눌러보면(그래도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까마귀 한 마리다. 모니터에 뭐가 뭍은 거 아니니 혹 모니터 닦고 계신 분은 안 그러셔도 된다. 


있는 줌 없는 줌 다 당겨서 찍어본다. 120mm로 당긴 사진인데 똑딱이로는 확실히 아쉬운 면이 있다. 크롭을 해볼까 했더니 여지 없이 해상도가 무너져 버려 그냥 원본을 올린다. 그래도 이 정도로 보이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이럴 때는 니콘의 신병기인 D800이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뭐 그건 나중 일이다. 그래도 똑딱이가 이 정도로 사진을 잘 담아내는 게 오히려 기특하다.


자운봉 3.2Km.. 0.7Km 남았다 이러면 유혹에 끌려 한참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만 3Km가 넘어가면 빨리 포기할 수 있다. 산행으로 3Km면 도봉산의 난이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눈길을 감안하면 3시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싶다. 이미 시간이 꽤 되었고.. 또 어딜 갈 때 내가 늘 그렇듯이 먹을 것을 전혀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별 미련없이 둘레길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이 웅장한 건물(광각렌즈 효과일 뿐이다)은 도봉산 주등반로의 시점을 알리는 도봉분소다. 여기서부터 도봉산 등산을 시작하면 비교적 무난한 코스로 오를 수 있다. 내가 가장 가 보고 싶은 코스는 사패산에서 도봉 능선을 따라 북한산 백운대로 이어진는 코스인데 부실한 체력으로 산 3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싶어 일단 간만 보는 중이다.


평일임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도봉산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 사진을 잘 찍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분위기가 괜찮아 보여 한 장 남겨 본다. 강북5산 중에 도봉산과 북한산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산이 아닐까 싶다. 사패산이나 불암산, 수락산과 같은 이름은 어쩐지 조금은 낯설다. 아무튼 서울의 북쪽으로 이렇게 방대한 산자락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도봉산 등산객들과 갈라져 다시 둘레길 코스로 돌아오면 한적한 길이 이어진다. 이쪽 길은 휠체어를 탄 이들도 둘레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길이라고 하는데 아마 둘레길 전 구간에 걸쳐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구간에 이런 시설을 마련해두면 물론 좋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경치가 좋고 접근성도 괜찮은 이곳에 마련해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길을 걷고 또 걸어 하늘의 파란색과 땅의 하얀색이 만나는 길을 끝까지 오르면 18구간 도봉옛길도 어느새 종착점에 다다른다. 이제까지 걸어온 둘레길의 여러 코스 중에 단 한 구간을 고르라면 이곳 도봉옛길을 추천한다.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고(난이도도 '하'다). 주변에 둘러볼 수 있는 곳들도 많고 경치도 꽤나 좋은 편이다. 계절 가리지 않고 걷기에 참 좋은 길이 아닌가 싶다.


아무렇게나 묶여 있을만한 녀석이 아닌데 묶여 있다 싶어 한참 서로 바라본다. 저 녀석은 저기 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까. 나는 저 녀석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겠지만 그래서 저 녀석에게는 금방 잊히고 마는 그런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저 개는 단 한 마리로 기억되고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기억 속에 맴돈다.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만남은 스치는 순간 바로 잊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평생에 걸쳐 기억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기억에 오래 남거나 혹은 바로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얼굴들을 떠 올려 본다. 힘들여 기억해보려 하지 않아도 곧 떠오르는 얼굴들은 분명 내 삶에 좋은 면이건 그렇지 않은 면이건 큰 영향을 준 이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친 후 잊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참 후회스러운 일이었어..라고 기억하거나 기억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다행이었어..라고 서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오랜만에 눈 덮인 산에 이끌려 걸어본 둘레길이었다. 이제 정말 막바지구나 싶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3구간. 두 구간은 하루에 걸을 수 있고 우이령길은 예약제로 운영이 되기에 편한 날을 잡아 걸으면 된다. 총 21개 구간 71Km에 이르는 길. 어쩌면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맺음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여러 의미를 주는 것 같아 또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둘레길 완주가 끝나면 북쪽의 산들부터 하나둘 다녀볼 생각이다. 아마 첫 번째 대상은 사패산이 아닐까 싶은데 언제가 될 지는 역시 정해두지 않기로 하겠다.




Panasonic LX-5


4구간을 마치고 5구간은 조금 여유있게 출발할 수 있다. 북한산국립공원 정릉주차장에 5구간의 입구가 있는데 그전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음료수가 부족하면 이곳에서 보충하고 등산장비를 가지고 갔다면 마찬가지로 확인을 하고 출발하도록 하자.  5구간은 1구간부터 걸어온 이라면 처음 만나게 되는 상급 코스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구간은 중간에 빠져 나올 방법이 없다. 즉 한번 들어가면 구간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코스 자체가 그렇게 험하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제법 길게 이어져 있고 군데군데 등산로처럼 바위로만 길이 이어진 곳이 있으니 등산화 정도는 신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4구간의 편안한 마음으로 진입하기는 약간 무리가 따르는 곳이다.

이전 글에도 올린 그림인데 실제로 5구간의 거리는 4km가 조금 더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직선거리로만 볼 것이 아니고 고도차가 제법 크기 때문이다 만약 5구간을 시작점으로 한다면 지하철 4호선 길음역 3번 출구에서 143, 110B번을 타고 북한산관리공단입구에 하차한 다음 주차장 쪽으로 이동하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도계가 정밀하게 맞지는 않지만 출발지점인 북한산 주차장의 고도가 가장 낮고 이후로 진행함에 따라 전체적으로 고도가 상승하는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 구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를 보면 내리막보다는 오르막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5구간이 종료지점에 가 보면 생각보다 높이 올라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명상길이라는 이름을 잘 기억해두자.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둘레길의 각 구간은 구간별로 특색이 두드러진 편이다. 명상길이라면 그만큼 생각을 하기에 좋다는 의미일텐데 과연 그런 구간인지 올라가보면 알게 된다.

부처님오신날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길을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방문자 수를 확인하는 개찰구 비슷한 곳을 지나게 된다 시작점부터 오르막 계단인데 어지간해서는 끝날 생각은 안 한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새 구간의 끝지점을 만날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마주치는 둘레길 표지판. 계단을 지나 흙길을 조금 걷가보면 다시 계단과 만나게 된다. 전에 다녀왔던 설악산 대청봉 코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잠깐이나마 그때 생각이 나기도 했다.

계단의 끝에는 스탬프투어 하는 분들을 위한 포토포인트가 있다. 여기서 셀카 한 장 찍고 주변 경관을 한 번 바라보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전망대라고는 하지만 약간 빈약한 느낌이 든다. 전망대에 도착하면 이제 명상길이 대충 어떤 모양의 길인지 짐작이 된다. 구간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진행이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이번엔 내리막이다. 계단이 제법 잘 꾸며져 있다. 명상길을 걷다 보면 내리막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앞서 적은 것처럼 구간 전체가 위로 올라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내려왔나 싶더니 보이는 오르막 계단. 길을 걷다보면 이길을 만든 이들이 새삼 대단하다 싶다. 전국의 어느 산을 가도 마찬가지인데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것과 일을 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은 말그대로 천지차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힘겨움으로 인해 내가 지금 편하게 길을 간다는 생각을 둘레길 걷기에 나선 이후 처음 하게 되었다.

한참 올라가니 저 멀리 내리막이 보인다. 시작점에서 조금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면 이 정도 오면 제법 숨이 찰지도 모르겠다. 명상길이라는 이름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속도를 줄이다. 빨리 걷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천천히 걸어도 가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은 여행이다. 집을 나서 먼길을 왔는데 굳이 힘겨워하며 걸을 필요는 없다.

5구간 명상길은 전체적으로 '산'이라는 느낌이 많이 드는 구간이다. 이전의 구간들처럼 민가와 마주칠 일도 없고 오직 사방이 산이다. 자연 그대로의 공간이고 그 안을 조용히 걷다 보면 어느샌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전 구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바위길이다. 이런 길들이 여러 군데 나오고 내리막도 이렇게 바위로만 이루어진 곳들이 있다. 운동화를 신은 분이라면 주의를 해야 한다. 여름이라 크게 무리는 없지만 겨울에 이 구간을 지날 때에는 아이젠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돌과 나무들도 이제는 하나 둘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처음 둘레길 걷기를 시작할 때와는 몸이나 마음이나 많이 달라졌다. 목적지에는 언제든지 도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언제 도착했느냐보다 어떻게 도착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된다.

여름이지만 낙옆은 어디나 존재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 길이지만 차분히 내려다보고 거기 있는 존재들과 차분하게 대화를 해 나가며 걷는다.  길은 사람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우리가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있어 그 이야기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 뿐이다. 사람과도 마찬가지다. 마음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돌이켜 생각해보자.

길은 멀리 이어져 있고 사방은 온통 나무들 뿐이다. 오고가는 이들도 없어 정말 적막한 분위기. 가끔 들리는 까마귀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리는 듯하다. 이 구간도 햇살이 직접 내리 쬐는 일은 거의 없어 들고 간 모자는 그냥 가방 속에 넣어두고 손수건 한 장만 꺼내어 들고 걸었다. 

이렇게 많은 길들이 내가 모르는 곳에 얼마나 또 많이 있을까 생각을 한다. 세상의 모든 길을 다 걸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어도 본다. 하지만 사람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다. 한 사람이 두개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네들은 가지 않은 여어 개의 다른 길에 너무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굉장히 단조롭고 큰 변화가 없는 구간인 명상길. 왜 명상길이라 이름지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4구간을 걸을 때는 괜찮았던 왼발에 슬슬 부담이 간다. 다음에 가라는 말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선 것을 처음 후회했던 순간. 그래도 길이 있으니 가야지..

만약 저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길을 냈다면 이곳의 의미는 퇴색했겠지. 나무는 그대로 자라게 놓아두고 그 사이로 길을 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자연을 함부로 거슬러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자연의 흔적들이 인간의 욕심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길이 끊어졌나? 생각했다가 바위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길은 사람이 내는 것이 아니라 산이 허락하는 것이다. 문득 든 생각인데 사람이 억지로 길을 내기는 했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길은 원래부터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 주어진 길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며 걷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보다 더 편안하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이정표가 등장한다. 거의 막바지인가 싶었는데 사실 여기서도 조금 더 가야 한다. 오히려 형제봉까지 가는 길이 더 가까운데 둘레길을 올 때마다 정상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하지만 정상은 언제든 오를 수 있고 둘레길은 지금 가야 하는 길이다. 

55mm렌즈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던 구복암. 바위 이름인지 뒤의 암자 이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말 큰 바위 두 개가 버티고 서 있다. 아무리 뒤로 가도 내가 담을 수 있는 사진은 여기까지.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지긋한 노신사분도 이 바위를 보고 카메라를 꺼내든다.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같은 공감을 준다.

한참을 더 걸으면 마지막 계단을 만날 수 있다. 5구간 명상길의 계단은 나무만으로 되어 있지는 않고 중간중간에 바위들을 모아 계단 역할을 하게 꾸며놓은 곳이 많다. 비가 오게 되면 미끄러지기 쉬운 점도 주의사항.

5구간의 종료 지점은 6구간 평창마을길의 시작이다. 다음 방문시에는 여기서부터 시작을 할 생각이다. 국립공원의 안내를 그대로 따르면 걷지 못하는 길이 생기는 점이 아쉽기 때문이다. (다행히 6구간은 홈페이지의 안내도 이곳에서부터다) 

이문을 나가도 바로 교통편이 있지는 않다. 멀리 보이는 길에서 왼쪽으로 나가 10여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주의할 것은 걷는 방향에서 버스를 타게 되면 출발점인 길음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 경우는 불광역으로 향했기에 그대로 탔지만 만약 4호선을 탈 생각이라면 길을 건너 반대편에서 차를 타야 한다.


아무튼 이번 구간은 '수동'으로 돌아본 구간이었다. 노출도 초점도 모두 머리속에서만 계산해야했고 아주 오래 전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사용하던 어설픈 공식들을 쥐어 짜가며 한컷 한컷 담아보았다. 사진을 찍는 것도 걷는 것만큼이나 아날로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걷기가 아니었나 싶다.

4구간, 5구간은 아주 어릴 적에 살던 동네와 이어져 있어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찾았던 곳이다. 6구간 평창동 역시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집이 있던 곳이라 자주 다니던 곳이었는데 우연치 않게 둘레길을 걷기로 한 것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신기했달까..

역시 인연이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가 없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해서 이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운명론에 빠질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사람의 힘이 닿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할 일을 다 하면 그때는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라는 고사성어도 있지 않은가...

발의 통증이 생각보다 깊어 이후 일정을 어떻게 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몸을 조금 움직여 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시작한 걷기가 조짐이 이상하던 발에 무리를 준 모양이다. 그래도 차라리 몸이 아픈 것이 낫지 않을까라며 위안을 해보지만 아직은 마음 역시 완전히 낫지는 않은지라 이중고에 시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둘레길은 매력적이다. 다음 주에 걸을 수 있기만을 바라며...


Nikon D700, Ai micro Nikkor 55mm f/2.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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