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오늘은 역시나 가을날답게 하늘은 높고 사람은 살찌는 평온한 주말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즈음 후배로부터 몇 건의 문자가 오고 가게 되었고 하던 일을 멈추고 한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지금 어떤 삶의 모습을 살아가고 있건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네들은 서른을 훌쩍 넘기고나면 미래에 대한 막연함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때쯤되면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불안한 마음이 들게 되지요.

아마 많은 부분에서 그 원인은 경제적인 문제가 차지할 거라고 생각을 하곤 했는데 여기저기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그것만도 아닌 여러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히더군요.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누군가 우리의 미래를 잘 만들어진 계획표에 담아 놓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강요를 했기에 우리로서는 당장 공부가 싫어도 공부만 하면 되니 차라리 속 편안한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고부터가 문제였죠. 그 다음에는 어떤 것을 하라고 누가 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하고 집사고 아이 낳았더니 살아갈 낙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바로 이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혹은 가족이 원하는 틀을 맞춰갈 때는 목표가 있었지만(물론 자신이 정한 것은 아닌 경우가 많지요) 그것들이 하나둘 이루어지고나니 '공허함'이 밀려드는 것이지요. 이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해 때로는 안 좋은 관계에 빠지는 일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사회적인 문제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모가 아이에게 꿈을 불어넣어주지 못한 탓도 분명히 있습니다. '넌 무조건 좋은 대학 가야해 그래서 좋은 직장 들어가고 그 다음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대로 따라갔더니 나중엔 뭐가 하고 싶은 지 본인이 모르는 것이지요. 뭔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은지 그 자체를 모르는 겁니다. 저는 미혼에 아직은 독거노인이라 어찌할 방법은 없지만 아이들 기르시는 분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주세요.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어릴 때 불어넣어주는 건 부모님의 가장 큰 역할입니다. 선생님들의 역할도 이에 못지 않죠.

글이 삼천포를 지나 만리포로 가고 있네요.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닌데...(그래도 아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제가 글을 쓰는 스타일이 하나의 글을 여러 번 며칠에 걸쳐 쓰는 편인데 한번에 생각나는대로 지금처럼 쓰다보니 원래 쓰려던 글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네요. 아무튼 쓰고 싶었던 것은 맨 위의 부분인데 이어서 적어보면...

스스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시점에 다다랐다면 그때가 바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꿈을 준비할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서른이건 마흔이건 혹은 예순이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순간부터 스스로의 생각과 힘으로 살아가는 첫날이 되기 때문이지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삶은 수백 살을 살아도 나의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내 의지대로 살아야 그것이 자신의 삶이지요.

다만 어떤 선택이건 그 선택에는 온전한 책임이 따릅니다. '이제까지는 주어진 길대로 살았으니 나는 아무 책임이 없어.' '주변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부모님이 그러라고 해서 그랬지..' 이런 류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결국 자신이 자신의 삶을 한 번도 제대로 산 적이 없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지요. 그러다보니 정작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해야할 때 머뭇거리게 되고 주저하게 되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다는 것.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하게 되면 이제는 온전히 홀로 서서 걸어야 합니다. 함께 걸어가 줄 동반자나 동지가 있다면 좋겠지만 홀로 내린 선택의 경우는 이럴 경우가 거의 없죠.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길에 대해 후회나 미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아빠가 이미 자전거의 뒤를 잡아주지 않고 있음에도 잘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한 아이가 곧바로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는 많이들 들으셨을텐데요. 막상 홀로 걸어가보면 처음의 두려움보다 스스로 나아가는 하루하루에 감사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물론 이 역시 연습이 필요하죠.

끝으로 적자면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은 자기자신입니다.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걸어가는 길이 그리 고되거나 힘겹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위에 적은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글은 어쩌면 저 자신을 한 번 더 토닥이는 글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제게 의견을 구했던 분들께 전하는 제 답변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이건 그 선택은 최선입니다. 똑바로 걸어가면 됩니다. 두 다리로 어깨를 활짝 펴고말이죠. 늦은 주말 마무리들 잘 하시기 바랍니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Ilford Pan F, LS-40

 



이제 극장에서 내려갈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간히 연인들이 보이고 홀로 온 몇몇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열풍이 한 번 세차게 휩쓸고 지나갔지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던 점은 리들리 스콧과 에일리언 뿐이었다.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와 토론들을 미리 읽지 않은 것은 감독 이름과 에일리언이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제법 많은 편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역시 고정관념을 떨칠 수는 없었고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장면장면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심각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장면은 왜 등장했을까?' 이런 생각이 영화를 보는 것을 상당히 방해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흐름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는 제목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불을 선사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혹은 아직도 치르고 있을)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은 왜 지어진 것일까. 그리고 위에 보이는 영화 포스터 중간에 써 있는 다분히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저 문장이 이 영화의 주제일까?

결론적으로 어떠한 해답도 영화를 보는 동안 찾아낼 수는 없었다. 리들리 스콧이 어떤 의도를 했건 해석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영화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장면들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되돌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깔려 있는 복선들이나 상징이 워낙 많아서 좀처럼 '이것은 이래서 이렇다'라는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존의 리들리 스콧의 작품들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적당한 킬링 타임용 SF물로 변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SF물로 보기에는 액션성(액션을 할만한 주인공도 없었다)이 우수한 것도 아니고 흔한 러브라인(일부러 끊어버리는 의도가 눈에 보일 정도)도 없다. 그래픽 기술이 좋긴 하지만 최대한 끌어올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재미도 별로 없고 뚜렷한 주제도 없는 맹탕같은 영화였을까...

화면에 비춘 장면들만을 놓고 보면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이 영화의 전부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존재인가가 인류를 만들어냈고 인류는 그 존재를 찾아나서게 된다는 것. 이것이면 충분했다. 우리 인간은 인류가 생긴 이래 이 질문을 해 왔고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질문. 철학과 과학에도 등장하고 신학이나 문학에도 등장하고 누구라도 한 번쯤 생각해봤을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이 이 영화의 주제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당연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누구나 다 아는 그리고 아무도 풀지 못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 리들리 스콧은 이 영화를 만든 셈이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블레이드 러너 역시 내 해석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나와도 뭔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풀리지 않을 의문을 다시 확인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는 90년대 학번이었던 내게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리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절망.. 그런 여러 감정들 속에서 고시라는 당시는 어쩌면 당연한(그리고 현실을 외면하는) 선택을 해야했던 내게 이 노래는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또 찔렀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이곡을 들었을 때 여전히 그 가사 속의 모든 상황들이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당시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내게 던져진 질문은 같았고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적당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 어쩌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바닥에 깔아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것을 나는 이리저리 외면하고 모른 척했다.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 순간만 넘기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그 어려움만 극복된다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그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다시 주저 앉아 버리고마는 나태함과 안일함.. 

그리고 지금 90년대 학교 도서관의 내 모습으로 현재의 나를 다시 일치시키려 한다. 감정이나 의지나 노력, 사랑같은 것들은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줄 수가 없기에 나는 이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단어들로 가득 차 있는 법전과 법서를 펼치고 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대의 흐름에 귀를 막고 가끔 마주치게 되는 순진한 인연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게 있어 가장 큰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마주쳐야 했고..이걸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차일피일 시간만 미뤄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 미룸이 얼마나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미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 사실과 맞부딪히기가 너무 싫었는데..이젠 뭐랄까.. 참 초연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 녀석을 다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0년대의 어느 날. 최루탄 냄새 매캐한 도서관에 앉아 선배들, 친구들과 나누던 이야기들, 수줍은 얼굴로 지나치며 눈을 내리감던 첫사랑 그녀의 모습, 붕어빵 한개로 하루를 버티며 스스로 대단해했던 어느 유치한 날들, 지하철 역 아래 소주집에서 못 마시는 술을 마시며 시대를 이야기하던 나날들..그 모든 풍경들이 문득 새롭게 컬러가 업혀지며 내눈 앞에 다시 선명하게 보인다. 같은 기억도 어떻게 되돌리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지금의 나는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아쉬운 감정을 느끼지 않고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하는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것이 가족이건 혹은 다른 누구건 그들이 내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만큼 내가 살아온 날들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던 과거 역시 내 삶이었다.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사람들 모두 현재의 나를 만들어온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이젠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편하게 과거를 마주할 수 있고 말을 건넬 수 있다.

다시.. 시간을 그렇게 되돌린다. 모든 기억을 안고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 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호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집 빠른 차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2.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세상에 그 사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줄 알았지요. 내 삶이 아닌 우리로서의 삶. 그와 내가 말 그대로 하나가 되어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세상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만나기까지의 과정, 만난 후의 삶의 모습들이 참 특별하다 생각을 했었고 그런 소중함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같이 끌어안고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우리의 만남과 우리의 일상은 사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었지요. 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인데 세상과 우리를 나누어 생각한게 가장 큰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세상에 비춰보고서야 우리의 길이 서로 엇갈려있음을 그리고 둘의 길이 영원한 평행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 감정만으로 세상을 넘어서고 아니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세상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요.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그녀도 나도 이미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남은 우연처럼 혹은 기적처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다가오지만 헤어짐은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이별을 이야기할 것도 없이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안녕이라는 말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순간마다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도 그것이 현실화되면 감정의 폭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헤어진 이후에는 늘 좋은 기억과 행복했던 추억들이 먼저 떠오르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제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을 바라봅니다. 조금씩 걸음을 걸어보기도 하면서 이길이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구나..나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이구나..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까지.. 그러니까 함께 걷던 그리고 함께 걸어갈 수 있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이기에 처음에는 제법 낯설고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그렇지만 걸어가야겠지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록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추억과..그리고 둘이 함께한 기억, 둘이 함께 할 미래와 멀어지지만 그래도 걸어가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걸어가야 할 나의 길이니까요..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라는 구상이 대체로 있었는데 경기가 갈 수록 안 좋아지니 계획이 예정대로 되지 않고 계속 밀리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경기가 나아지고 그래서 원래 하고자했던 일이 시작되기를 기다리자니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만 질 것 같은 분위기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무언가 인생에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적어도 결혼을 포기한 입장에서는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모험에 운을 걸어볼 여지가 많기는 하다. 사실 번드르한 사무실에서 양복에 넥타이 매고 앉아있는다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세월동안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일이 되었건 나 스스로가 집중을 하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윤택하게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가치를 찾는 것.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없는 시대를 살면서 마냥 장밋빛 꿈만 꿀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단순한 진리는 이 시간에 더욱 빛이 난다.

자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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