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건네진 책은 '스님의 청소법'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입니다. 게다가 걸레 한 장으로 삶을 닦는다는 수식어까지 붙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청소와 수행은 어떤 관계가 있고 그것이 인생에는 또 어떤 영향을 줄까 궁금해집니다.

수도자들에게 있어 청소는 상당히 중요한 자기수양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책을 통해 불교의 청소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가톨릭의 수도자들에게도 청소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만이 아닌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놓일 자리에 제대로 놓는다는 말이지요. 한번 지금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세요. 온갖 물건들이 제자리에 바르게 정리되어 있으신가요?


책에 실려 있는 내용들은 어찌 보면 새로운 것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위의 목차를 가만히 들여다봐도 '아, 다 맞는 말이네'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굳이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말이죠. 하지만 이책의 의미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스님이 직접 실천한 뒤에 그 이유와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그것이 실행할 수 없다면 공염불에 그치는 법입니다. 수많은 힐링서적들이 유행하는 요즘이지만 저자가 직접 실천을 하며 증명까지 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책의 구성이 비슷해 살펴보니 예담에서 나온 책입니다. 재생지 특유의 진한 향과 글이 꽉 차지 않아 여유로운 편집 그리고 큼직한 폰트의 배치가 특징이죠. 다만 이책은 '색'을 써서 강조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진이 들어가있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수행'이라는 틀 안에서 '색[色]'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실 청소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거의 매일 이루어지다시피 하는 아주 사소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마치 살림이 그렇듯이 청소라는 것은 해도 티도 잘 나지 않고 막상 하는 동안에는 손도 많이 가고 신경도 제법 쓰이는 꽤나 피로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보니 청소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겠지요. 하지만 청소를 하지 않으면 금세 티가 납니다. 책상 위에 샇인 먼지들이 하루만 지나도 손가락에 묻어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그 청소를 즐겁고 하고 싶은 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변화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적은 것처럼 청소란 버리는 것만이 아닌 제자리에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방 안에 있는 수 많은 물건들 중에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간직해야할까요? 언젠가는 쓰이겠지하고 구석 어딘가에 넣어두는 것은 일종의 낭비입니다. 스님은 차라리 그런 것들을 바로 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공감은 가지만 막상 실천해보려면 쉬운 일은 아니겠죠? 특히나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들은 그 처리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그 물건을 주기 위해 들인 노력이 컸다면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 낫다'고 말이죠. 제법 명쾌한 해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물건들을 제자리에 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쓰임새를 내가 알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내가 그 쓰임새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고 한편 생각해보면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방 안을 하나둘 정리해나가다가 어디에 두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바로 위에 적은 '버리는 일'을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쓰임새가 있는데 내게는 딱히 쓸데가 없다면 그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결국은 이런 맥락이 아닐까요.


스님은 청소하는 행위 자체에 또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그 행동 자체에 말이죠. 청소를 하는 동안 그 행위 자체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다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정소하는 행위 자체를 번거롭거나 거추장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가 함께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청소라는 행위와 그 결과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하나둘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수행과 다름없다는 것이 스님이 끝내 건네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지금 앉아계신 사무실의 책상이나 방 안의 모습이 자신의 마음속이고 자신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봤을 때 얼마나 정리되어 있고 깨끗한가요? 혹 지저분하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손을 들어 하나둘 치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지요. 그렇다고 새로 청소도구를 사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어지간한 청소는 몸과 걸레 한 장이면 충분하니까요.



아무 예정도 없이 문득 아침에 생각이 나 길상사로 발길을 옮겼다. 길상사..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사실 그 위치가 삼청동 어딘가로 알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관심이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마음을 좀 차분하게 정리해보자는 생각에 무척이나 흐린 하늘을 위로 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길상사 홈페이지에 들러 길을 알아보니 삼청동 근처기는 한데 정확한 위치는 성북동이다. 삼청동 어딘가에서 본 이정표를 떠올리며 삼청동으로 향했으면 조금 더 많은 걸음을 걸었겠지 싶다.

위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지만 4호선 한성대입구 역에서 그냥 직진을 하다가 우회전을 살짝한 다음 또 직진을 하면 되는 간단한 경로였다. 셔틀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이 정도면 걸어가도 되겠네?'라며 뿌리치고 출발했는데 편한 복장이 아닌 다음에는 셔틀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 평지를 어느 정도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내내 오르막이다. 성인 남자의 발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리니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길상사로 가는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내려오는 셔틀버스 시간표다. 아침에는 조금 자주 있는 편이고 오후에는 드문드문있으니 시간대를 미리 알아보고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내려오는 길은 내리막이니 걸어간다고 해도 올라가는 길은 날이 슬슬 따뜻해지는 요즘이라면 제법 땀을 흘려야 한다.

걸어올라가는 동안 좌우로 제법 큰 주택들을 볼 수 있는데 성북동, 평창동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부자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이 동네는 평창동이나 구기동처럼 오래 전부터 부유한 이들이 머물고 있는 곳인지라 신흥 부촌들에 비해 소박(?)하다는 느낌도 든다. 아무튼 걷는 내내 딱딱한 포장 도로라 발이 편하지는 않다. 그렇게 걷다 보면 오른쪽에 길상사 입구가 보인다.

길상사는 많이들 아는 것처럼 1997년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개조해 만든 곳이다. 법정스님은 이곳을 절 냄새 나지 않는 곳으로 만들라고 했다는데 입구의 분위기나 내부의 분위기 모두 보통의 사찰과는 다른 그러니까 절 냄새 나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다.

여느 사찰을 생각하고 사찰 풍경을 담아봐야지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길상사만이 줄 수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종교에 매이지 않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대원각이 법정스님에게 시주되어 길상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데에는 조금 더 먼 사연이 있다. 시인 백석과 그의 연인 자야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백석과 자야(백석이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에게 붙인 이름, 길상사라는 이름은 또한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비롯된다.) 법정스님의 이야기와 백석의 이야기 그리고 자야의 사랑이야기를 모두 담기에는 공간이 한참 부족하다.

길상사 경내에는 법정스님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스님의 글귀 중에 따온 것들을 나무로 틀을 짜 액자처럼 군데군데 걸어둔 것이 그것인데 책으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전후좌우로 길게 뻗친 좁은 길들을 걷다가 문득문득 만나는 글귀들을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많아 호젓하게 생각을 하기는 수월치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공간을 걸으며 오래 전 연인의 이야기, 스님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니 장소는 그대로인데 사람만 없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쓸쓸한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백석이 걷던 혹은 자야가 걷던 혹은 법정스님이 걷던 그길의 모래들은 아직도 그대로일텐데...


당시의 열렬했던 사랑, 수도자의 염불도 이제는 간곳없이 사라지고 세월의 바람에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는 건물들과 몇해의 세월 피고지고를 반복해온 꽃들이 낯선 이방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길상사 경내를 걸으며 내가 느낀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법정스님과 백석과 자야를 모두 생각하며 경내를 돌아보기는 쉽지가 않았다. 뜨거웠던 연인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곳 그리고 그 열정만큼이나 한 시대를 이끌어온 수도자의 넋이 담겨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인데 절을 나와 내리막길을 걷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은 그 뜨거움이 그 마음이 본래는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하나만 보고 그것을 섣불리 판단했구나..'는 후회가 밀려왔다.

사랑도 수행도 결국은 마음의 일이고 마음의 일이라는 건 온전히 사람 그 자체의 일이다. 애써 그것을 나누려할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하나로 묶어 내 안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세속의 삶 속에서 '무소유'를 이야기한 법정스님 그리고 '1,000억이라는 돈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이야기했던 자야... 결국은 같은 것이다. 모두가 사랑이다.

몹시도 흐린 어느 봄날, 갈상사를 찾은 내 마음은 거기서 잠시 멈추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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