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도 지난 지 2주가 넘었습니다. 23일이면 우리 24절기 중 '처서'지요. 더위가 물러간다는 절기입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워서였는지 참 견디기 힘들었는데 어느샌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찬기운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가을입니다. 가을은 '아, 이제 가을인가?'라고 생각할 즈음이면 이미 가고 없는 특이한 계절입니다. 달로 따져보면 10월 정도가 그나마 가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올해는 뭐랄까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렇지 않은 적이 없겠지만- 유난히 스펙타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생이 여러 번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아직 올해가 몇달이나 더 남아 있으니 -벌써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요- 어떤 일들이 더 생길지 참 흥미진진해지기도 합니다.

발이 아프다는 핑계아닌 핑계로 사진을 찍으러 밖을 다니지는 못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덕분에 북한산 일정도 가을이나 되어야 갈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사진이라는 게 어디를 가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이 또한 게으름과 나태함을 감추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합니다. SLR이 무겁다고 서브카메라까지 들여놓고서 그놈 역시 제습함에서 쿨쿨자고 있으니까요..

마음은 여전히 허전합니다. 가을이 오고 그 가을이 깊어가면 그 허전함은 더해지겠지요.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운 벗이 바로 이 허전함이라는 녀석이 아닐까요. 이 녀석이 항상 곁에 있으니 떨쳐버리고 싶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해 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연초부터 달라붙은 이 녀석이 영 떨어질 줄을 모르고 더 품으로 파고들고 있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네요.

세월은 가고 나이는 먹어가고 추억은 쌓여갑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삶인데도 우리는 너무나 당연스럽게 내일을 이야기하고 다음 주를 이야기하고 내년을 이야기하며 살아가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 혹은 만났던 사람 중에 혹은 가졌었던 물건 중에... 딱 한 가지만 그대로 되돌려준다면 어느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Nikon D100, AF-S Nikkor ED 17-35mm f/2.8D 



마음이 산란한 탓인지 담배 한 대를 피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앞 구석에 누군가 버려둔 유리판이 몇 주째 있는데 제법 크기도 크고 게다가 3조각으로 잘려있어서 위험하겠다 싶었지만 누가 거기에 가져다놨는지 알 길이 없어 그냥 무시만 하고 지내다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저 유리판들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그래도 그 유리판들이 어쩐지 시원해보이기도 하고 각도를 잘 잡으면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보여주기도 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오늘따라 왜 저 유리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냥 위치도 잘못되어 있는 것 같고 처음엔 맑기만 했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먼지를 뒤집어써서 흐려지는 것이 싫었나보다.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고 아무 생각없이 가장 큰 조각을 오른손으로 잡아올렸는데 내가 생각한 무게와 큰 차이가 있었는지 그대로 미끄러지며 오른손을 가르고 지나갔다. 잡은 면이 당연히 마모작업이 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순식간이란 단어가 그렇게 실감이 날 줄은 몰랐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사이로 유리판이 미끄러졌는데 뭔가 묘한..말로 표현하기 힘든 찰라의 통증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더니 금세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습게도 그 순간 든 생각은 '나도 살아있긴 하구나' 였으니 참... 아무튼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본 것도 처음인데 왼손으로 지압을 하며 '힘줄은 안 끊어졌어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유리란 물과 같이 투명하다. 다만 물은 그 모양과 흐름을 그저 맡겨둘 뿐이고 유리는 누군가에 의해 그 모양이 정해진 것에 차이가 있다. 그렇게 강제로 만들어진 투명함은 본래의 맑음보다는 억지로 만들어진 것에 대한 상처를 그 내면에 담고 있어 누군가 자기에게 상처를 줄 것 같으면 가차없이 상대의 살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상대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만 정작 유리는 깨끗하다. 그 유리에 은가루를 입혀 거울로 쓴다는 것은 또한 아이러니다...

아무튼 모든 문제는 그 유리를 마주하는 이의 마음이다. 자기의 마음이 좋을 때는 한없이 맑고 투명해보이기만 했던 유리가 자신의 마음이 헝클어졌다는 이유로 탁하게 보인다. 애초에 유리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 그냥 원래 주어진대로 존재할 뿐인데 그것을 대하는 사람만 달라졌을 뿐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상대가 아닌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가장 맑은 것, 가장 투명한 것이 가장 날카롭다. 


Canon EOS-1Vhs, EF 28-70mm f/2.8L, Kodak Supra, LS-40


감옥을 둘러싸고 있는 탑은 높았다. 높은 탑과 꽉 막힌 벽들..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느 곳으로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느냐고 물어도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쓴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사실 내가 여기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알아낸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전에는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 시간이 갈 수록 나의 정체성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이런 곳에 머물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너무나 우울한 그리고 고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안에서 잠그게 되어 있어 바깥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잠가 버린 감옥의 문. 그것이 내가 갇혀 있는 마음의 감옥이었다. 문을 안에서 잠그고 두꺼운 자물쇠도 채워 두어 안에서조차 열쇠가 없으면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나 스스로를 가둬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아마도 한 번도 이 문을 스스로 열었던 적이 없었기에 사방에 퍼진 녹이 자물쇠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곳에는 제법 많은 방들이 있었는데 각각의 방마다 다른 내가 갇혀 있는지 아니면 이 많은 방들중의 하나에 내가 갇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방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시간이 갈 수록 방 하나하나에 또 다른 내가 한 명씩 늘어난다고 했다. 세월이 가면서 나는 그렇게 나를 하나 둘씩 감옥에 가두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많은 방들이 모두 다 차면 어떻하냐고 묻자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일 뿐 대답이 없었다.

간간히 빛이 들어오는 복도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창문들은 모두 열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빛이 들어오면 빛을 받아들이고 어두워지면 그냥 그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쩌면 수동적인... 어쩌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체념의 공간 그 자체였다. 저 멀리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이지만 나는 한 번도 그곳까지 걸어가본 적은 없다고 했다.

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묻자 나는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했다. 왜 이곳에서 나가야 하냐고... 나는 그 대답에 뭐라고 할말을 잃어 고개를 떨구고 바닥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최근의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은 제법 밝았다. 나는 끝내 내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나만의 공간에 또 다른 내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려했지만 나는 그 두꺼운 문을 안으로부터 잠가버렸다. 사방이 적막한 가운데 나는 문 안에 홀로 갇힌 나와 문 밖에 서 있는 나를 구별하기조차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근의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이 아침이면 해가 드는 밝은 방이라는 사실이다. 해마저 들지 않는 방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이곳을 찾아오는 것조차 막았을 텐데...

어쩌면 나는 머지 않아 이곳의 문이란 문은 모두 내손으로 열어버리고 자물쇠가 굳게 잠긴 정문도 열어버리고 밖으로 나올 것 같다. 사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기 전부터 내가 이곳에서 조만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Superangulon 21mm f/3.4, Ilford XP2, LS-40 Film scan


류시화 시인의 신작 시집인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의 첫번째 시를 읽다가 한 줄에 눈이 멎었다. 

'이미 떠나간 것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나는 이 행을 읽고 또 읽는다. 시인은 절반의 생을 길에서 보내며 비로소 떠나간 것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다한다.

나 스스로 이별을 결심하고 나 스스로 떠나왔음에도 나는 아직 작별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 했다.

아니 작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별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 이별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생각이나 가치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그 대상을 떠났다고 확신하면서도 마음 어느 한 구석엔가는 그 대상의 흔적들을 꼬깃꼬깃 접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미련이라 부르건 혹은 그 대상에 보낸 내 마음의 일부라고 부르건 상관없다. 

그저 나는 그것들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들인 마음이 아까워서 그동안 보낸 시간이 아까워서 그저 내 이기심에 붙들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에 대한 대답은 나 역시 시인처럼 길 위에서 찾아야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답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이별이 아플리가 없으니 말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실상 살아가는 동안 정말 마음을 비우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마 그런 상황이라면 대개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한 경우가 아닐까.. 이미 포기한 상태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본전이니 마음을 비우기가 쉽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마음을 비우기란 쉽지가 않다. 이렇게 마음은 소유욕, 욕심과 밀접하다.

손에 쥔 것을 놓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두 손 가득히 무언가를 잡고 있으면서 또 다른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다리 위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물고 있는 고기를 얻기 위해 짖어버리는 개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우리네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소유욕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때로는 위의 개의 우화처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얻으려 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마음을 비워야 얻는다는 것. 손에 쥔 것을 놓아야 얻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살아간다. 약하디 약한 것이 인간이다..권력을 원하고 재력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고.. 세상의 어떤 척도가 되는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무엇인가 없음에 대한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많은 철학자들이 익히 이야기한 것처럼.. 분리에 대한 불안. 참 적당한 해석이다.

결국..마음이 공허한 것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무엇인가를 얻고 추구한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집착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갈 수록 그 채움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음이 허전하면 허전할 수록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 가고 사람에 대한 집착이 커 간다. 그리고 그 집착은 욕심이 되고 때로는 폭력이 된다. 무엇인가 없다는 것은 이렇게 인간을 힘에 의존하게 만든다.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돈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결국 공허함에서 비롯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핑계로 국민과 민족을 내세우고 돈을 추구하는 핑계로 행복과 생활을 내세우고 성욕을 채우기 위한 핑계로 사랑을 내세우면서 정작 추구해야 할 본질들은 저 멀리로 던져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애초에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조차 잊게 된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허나 정작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도 못하면서 다른 것들을 향해 주먹 쥔 손을 뻗는 그런 삶을 우리네 인간들은 이제껏 반복해오고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모든 것을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그럼에도 먼지 한 톨조차 놓지 않으려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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