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에 한강을 걷는 것은 썩 기분내키는 일은 아니다. 딱히 해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기 때문인데 그래도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면 평소에 보지 못 했던 사소함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폭주행위를 금지하는 플래카드를 비웃는 비둘기떼라던가...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배워볼 수도 있다. 부실해 보이기는 하지만 저것을 던지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아무렇게나 서 있는 전봇대들은 이제는 그 기능을 모두 다 해 쓸쓸한 흔적의 하나로만 기억되고...


그 틈새는 지나가는 이들이 몰래 버린 시간의 찌꺼기들로 점점 차 오른다.


낡음이란 내쳐지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녹이 슬고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게 되면 기억에서도 잊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것은 비단 물건에만 한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비둘기들은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을 막론하고 존재하는데 가끔은 이 녀석들이 시간과 공간 모두를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시간을 뒤돌아볼 때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조연이 이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Contax Aria, Carl Zeiss 35mm Distagon f/2.8, Ilford XP2, LS40


낮의 도시가 밝을까 싶지만 사실은 밤의 도시가 더 밝다. 낮의 도시는 태양 아래 주어진 빛에 의해 보이는 풍광인 반면에 밤의 도시는 보여주는 빛에 의해 보이는 풍광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빛.. 그 빛에 비친 세상은 낮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순리대로라면 밤은 어둡고 캄캄해서 그 시간동안은 세상이 낮의 열기를 식히고 휴식을 해야 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밤의 어둠을 멀리 걷어버리고 낮에는 보이지 않던 치부마저 선명하게 드러내버린다. 그래서 가장 편안해야할 밤의 시간은 욕망의 시간이 되어 버리곤 한다.


Contax Aria, Carl Zeiss 35mm Distagon f/2.8, Ilford XP2, LS40


헤어짐을 겪게 되면 아쉬움과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개 그 아쉬운 감정에 좀 더 마음을 많이 두곤 한다. 하지만 헤어짐 이전에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소중한 인연인 그 만남이 있었고 덕분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애초에 그 만남이 없었다면 잠시나마 그런 행복을 느낄 여유도 가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자. 만남은 물론 이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별이 두려워 만남을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헤어진 후 느낄 허전함에 지레 겁먹는 것은 그 사람과의 인연의 가치를 떨어뜨려 버릴 뿐이다.

만나는 동안 행복했고 그 사람이 있었기에 미소지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짧은 인생에 그런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사하자. 그리고 그 추억을 위해서라도 떠난 그 사람을 아쉬워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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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이글은 지난 2006년도에 썼던 글이네요. 2006년도면 연애도 하지 않을 때인데 이런 글을 왜 썼는지... 아무튼 블로그 레이아웃을 변경하면서 사진들 크기를 수정할 필요가 있어 사진 카테고리의 글들만 조금씩 손 보고 있고 이곳에 올리지 않았던 원본 파일들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첫번째 글이 이별 이야기라 조금 민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원글이니 내용을 바꿀 수도 없고 해서 일단 그대로 복원(?)을 해봅니다.

콘탁스 기종은 처음에는 칼 차이즈의 T*코팅에 반해 사용을 했었는데 이후에는 흑백의 진득함에 많이 끌렸었죠. 지금은 사라진 메이커가 되어 아쉬움이 더 큽니다만... 칼 차이즈의 흑백과 라이카의 흑백은 그 느낌이 제법 다른데.. 이후 복원 포스팅을 보시면 아마 한눈에 구별이 되시리라 생각이 되네요.

사진들이 원판 필름을 스캔한 것이라 요즘처럼 보정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마 메이커나 필름의 고유의 색감을 파악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 싶네요. 아무튼.. 필름 카메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참 아쉽습니다. 충무로 사진 골목에서 방황하던 그 시절이 문득 너무나 그리워 집니다.

<덧>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글의 제목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Contax Aria, Distagon 35mm f/2.8, Fuji Reala, LS-40



이곳을 기억하는 분들도 제법 되리라.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흔적이 되어 버렸지만...

나처럼 아날로그적인 인간은 늘 이런 장면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고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는가보다.

신촌의 어느 길을 걸어도 지금처럼 화려한 네온사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

그 동네도 참 아날로그적이지 않았나 싶은데... 나로서는 가끔 들렀던 곳이니 자세한 속사정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과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묘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Contax Aria, Distagon 35mm f/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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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단렌즈를 애용했습니다. 일단 수동기여서 줌렌즈가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무거운 장비에 부담을 느끼며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죠. 처음 사진을 시작한 것은 니콘의 RF카메라였지만 본격적인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은 니콘의 F3를 손에 쥔 이후였죠. 이후 제법 많은 기변을 하게 되는데 "써 보지 않고 말을 말자"는 묘한 논리를 붙여 소위 좋다는 장비들을 섭렵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충격(?)을 받은 장비가 바로 콘탁스였습니다. 물론 라이카 역시 대단한 충격을 주긴 했지만 아직 라이카를 사용하기 전인 당시는 콘탁스 그러니까 짜이즈 렌즈의 결과물은 이전의 사진과는 뭔가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처음 장만한 짜이즈 렌즈는 누구나 좋아하는 화각인 50mm였는데 제 눈이 이상한 것인지 50mm는 아무리봐도 표준이라고 부르기에는 초점거리가 멀게만 느껴졌고 이것저것 시험을 해보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35mm입니다.

칼 짜이즈, T* 코팅으로도 유명한 이 렌즈는 렌즈마다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제가 사용해본 렌즈군은 플라나와 디스타곤이군요. 플라나(Planar)는 이미 그 역사가 100년이 넘은 렌즈로 칼 짜이즈의 역사이기도 하고 현대 광학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재밌는 것은 칼 짜이즈 렌즈는 표준이 35mm라는 점이죠. 따라서 플라나는 망원 렌즈로 분류됩니다. 오늘날에는 50mm가 표준렌즈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는 망원(엄밀하게는 중망원)인 셈이죠. 그렇게 보면 제 눈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지 싶습니다.

플라나도 마음에 들지만 제가 주력으로 사용했었고 아직도 구입 순위에 올려두고 있는 렌즈는 바로 디스타곤입니다. Distagon즉  거리를 의미하는 '디스턴스'와 각도를 의미하는 '곤'이 결합한 이 렌즈는 광각이라 풍경 촬영에 유리하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칼 짜이즈 렌즈 구성을 생각해보면 35mm 렌즈가 표준렌즈이니 광각으로 가려면 그 이하의 화각을 가진 렌즈를 찾아야겠죠.

니콘으로 건너오면서 칼 짜이즈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고 콘탁스가 단종이 되면서 칼 짜이즈 정확하게는 디스타곤을 다시 잡아볼 기회는 적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짜이즈의 역습'이라고 불러도 좋을 일이 벌어졌는데 수동 렌즈인 ZF(Z는 짜이즈, F는 니콘 마운트) 렌즈군이 등장한 것이죠. 그리고 소니와의 제휴로 AF렌즈까지 등장했습니다. 후자는 제 관심 밖이니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새로 등장한 짜이즈 렌즈군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렌즈는 바로 이 렌즈입니다. 짜이즈 디스타곤 25mm는 콘탁스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25mm라는 독특한 화각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25mm는 넓지도 멀지도 않은 참 묘한 초점대입니다. 크롭 디지털 바디라면 37.5mm의 화각이 되죠. 제 경우 지금 크롭바디이니 이 정도 화각이면 예전 표준렌즈로 사용할 당시에 큰 차이는 없어보입니다.


35mm보다 길이가 조금 긴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항상 바디에 마운트해두고 쓸 수 있는 단렌즈 하나만을 고르라면 저는 이 렌즈를 고를 생각입니다. 물론 가격은 왠만한 보급형 카메라 한 대값 이상이니 접근성은 아주 안 좋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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