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에 집을 나섰다. 아직 해 뜨기 전이라 사방이 어둑어둑하다. 의정부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이동 시간만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나오기는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지하철은 한산하다. 한 1-2시간후면 사람들로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겠지. 같은 장소도 시간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2013년의 시작은 둘레길이다. 산행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작년부터 시작한 내 나름대로의 일정을 일단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나선 길이지만 벌써 15구간이다. 오늘 2구간을 걸었으니 이제 5구간 남아있다. 멀게만 느껴지던 완주도 이제 종반에 접어들고 나니 무언가 해내고 있다라는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많다. 둘레길은 내겐 그런 기억을 남기고 있다.


안골길은 말 그대로 안골 계곡을 거쳐 지나가는 길이다. 사패산 자락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아주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 정도의 구간이다. 하지만 지난 눈이 여전히 덮혀 있어 아이젠이 없다면 여간해서 지나기 힘든 구간이 제법 많다. 집 주변을 걷다가도 넘어지기 쉬운데 하물며 산자락이야 오죽할까. 들고 다니기는 번거롭지만 신발에 붙어 있는 그 쇳조각에 그날 산행의 안전을 모두 맡겨야 한다.


오늘은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겉옷을 벗고 걸어야할 정도였다. 패딩을 배낭에 넣고 자켓 하나를 또 넣으니 배낭이 무슨 원정대처럼 빵빵해졌다. 겨울 산행에는 배낭이 일단 큰 것이 좋다. 리터수로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그건 사람마다 많이 다른데 혼자 다니는 내 경우라면 35리터 정도면 당일 산행에 빠지는 것 없이 다 챙겨 넣을 수 있다.


조금 올라가니 약수터가 하나 있다. 요즘은 약수터 보기도 쉽지 않고 또 찾더라도 여간 해서 그 물을 마시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는 약수터에서 나온 물이라면 벌컥벌컥 아무 걱정없이 마셨었는데 이제 와서는 이것저것 따져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고보면 내 지난 기억에서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감을 느낀다. 이것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질부적합 판정을 받아 마실 수 없다고 한다. 수질 부적합이라..그 원인은 다름 아닌 사람일텐데 우리 스스로의 추억은 물론 후세에 전해 줄 미래까지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 둘 없애가고 있다.


아이젠을 장착하면 눈 밟는 소리가 한결 커진다. 제법 걷는 느낌이 든다. 양손에 든 스틱을 앞발처럼 움직이며 걷는다. 스틱을 사용하면 네발이 된다던데 요즘 그말이 이해가 간다. 예전에는 오히려 번거롭고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외면했었는데 막상 사용해보고나니 이젠 없으면 허전하다. 습관이란 이렇게 강한 법이다. 습관을 잘 이용하면 자기 스스로를 조련(?)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도봉산인지 북한산인지 알 길이 없다. 거리로 보면 아마도 북한산이 아닐까 싶은데... 산 아래로 짙은 안개가 좍 깔린 것이 제법 멋드러져 한참 바라봤는데 사진으로 담아보니 안개가 어디있는지도 잘 보이질 않는다. 언젠가는 운해가 짙게 깔린 산 정상에 앉아 사발면이라도 먹어볼 생각이다. 둘레길에 오는 날은 흐린 날이 더 많았다. 오늘도 날이 흐린 편인데 내심 파란 하늘을 찍어오려던 계획은 좌절됐지만 흐린 날은 또 흐린 날대로의 운치가 있다.


이 구간을 걷다 보면 이런 군사시설(이라고 하기도 뭐한)들을 제법 보게 된다. 관리는 사실 거의 포기한 듯 하고 오래된 폼이나 생김새를 보면 지난 한국전쟁의 흔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전쟁은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요즘도 전쟁은 1초를 다투며 일어난다. 총칼을 들었건 아니건 한 존재와 외부 세계, 한 존재와 내부 세계와의 전쟁은 한 순간도 그칠 날이 없다. 


막아선 철조망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다. 참 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줄기가 철조망을 타고 올라가며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게 뭐랄까 굉장한 모순같아 한동안 그 앞을 서성였다. 너무나 반대되는 이미지를 가진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이다. 어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슷한 존재가 만나야 잘 어울리는 것만은 아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만나도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럴 수 없다는 선입견을 없앤다면...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참 단단하게 엮여 있다. 철조망은 줄기를 받아 들였고 줄기는 그 받아들임을 그대로 이용해 생명을 이어간다. 관계란 이렇게 되지 않으면 좀처럼 지속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관계의 유지에는 희생이 필요한데 서로 상대에게만 그 희생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다보니 문제가 일어난다. 스스로 희생을 할 생각은 애초에 접어둔채 "왜 너는 나에게 맞춰주지 않냐"고 울분을 토한다. "네게 맞추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묻지 않는다. 자신에게 누가 어울릴까는 묻지만 내가 누구에게 어울릴까는 묻지 않는다.


조금 더 걷다보니 특이한 지점에 이른다. 분명 산길인데 제설작업이 되어 있다. 산의 눈을 치울 정도의 능력을 가진 것은 "의무복무를 하는 군인이나 경찰"이 유일할텐데 이 근처에서 군 부대를 본 적은 없는데 어쩐 일인가 싶다. 설마 306보충대에서 인원을 가져다가 이곳의 눈을 치운 것은 아닐텐데 뭔가 희한한 산길이다.


이 정도면 사실 군인이 한 거라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상당한 거리를 질서정연하게 눈을 싹 치워놓았다. 둘레길의 경우 제설작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국립공원에서 한 것은 분명히 아니고 대체 누가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궁금해진다. 걷는 이의 안전을 위해 충분히 눈을 치우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있겠지만 여긴 애초에 산길이고 이곳을 오는 이라면 눈 덮힌 길을 당연히 기대하고 올텐데 이것은 좀 아니지 싶다.


추측이지만 이 제설작업을 주도한 곳은 의정부시가 아닐까 싶다. 15구간 안골길은 국립공원 소속이기도 하지만 의정부시에도 속해 있다. 그리고 이 구간은 의정부시에서 소풍길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정비를 해 놓은 곳이다. 걷다 보면 곳곳에서 국립공원과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이 없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그리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내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소풍길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유래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 인용한 거라 한다. 이 시는 읽을 수록 참 마음이 짠해지는데 나이가 들어갈 수록 점점 더 그 느낌이 진해진다. 세상살이...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 순간인지 이제는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래도 소풍처럼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예전에 적어 두었던 귀천이다. 둘레길에서 이 시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시인들의 언어란 확실히 우리네 소시민의 언어와는 사뭇 다르다. 짧은 문장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그리고 의미들을 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여기저기 이런 흔적들이 널려 있는데 둘레길을 걷는 입장에서만 보면 썩 유쾌해보이지는 않지만 소풍길을 걷는 입장에서 보면 둘레길 표지가 또 눈에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다. 조금전까지 '뭐지? 경쟁이라도 하려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던 내가 참 부끄러워진다. 길이라는 것은 애초에 누구의 것도 아니건만 이런 이름이면 어떻고 저런 이름이면 또 어떠랴. 그저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멀리 사패산이 보인다. 지난 번 걸음에서는 올라가보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담았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산이 부르는 날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같다. 오늘은 사패산이 나를 부르는 날은 아니었던 게다. 오늘은 북한산이 손을 길게 내민 그 자락을 돌아보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를 하는 셈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특히 자연 앞에서는 말이다.


15구간의 종착점은 16구간 보루길의 시작이다. 보루길은 북한산둘레길의 구간 난이도 '상'인 마지막 구간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약간 더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보루길과 마주하게 된다. 이곳 역시 길이 제설작업이 말끔하게 잘 되어 있다. 아이젠을 벗었다가 신었다가 하는 작업을 오늘은 제법 여러 군데에서 해야했다. 물론 흙길을 아이젠을 신고 못 갈 것은 아니지만 걸어본 사람이라면 선뜻 그런 모험을 하지는 않을게다.


회룡탐방지원센터다. 다소곳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한산둘레길을 이어갈 수도 있고 도봉산 등산을 시작할 수도 있고 사패산으로 오를 수도 있다. 도봉산 쪽으로 이동한다면 그대로 북한산으로 이어갈 수도 있는 요충지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제법 많은 이들이 이곳을 오고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탐방객수 조사하는 개찰구를 반대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나오는 식으로 빙글빙글 돌면 숫자가 올라갈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길게 난 도로를 걷는다. 멀리 사패산이 보이고 아버지와 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걸어오는 게 먼발치로 보인다. 여자아이가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보는 내가 다 웃음이 났다. 가족이란 참 좋은 것이구나. 내게는 저런 아빠가 될 기회는 없겠지만...


난이도 '상'구간 답게 입구에서부터 겁을 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둘레길의 '상'코스는 산행에 비하면 크게 어려운 편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구간은 계단과 오르막이 주를 이루기때문에 눈이 녹기 전까지 아이젠은 필수로 가져 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사패능선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저 능선에 일단 오르면 북한산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눈이 하얀 물감을 튕겨 놓은 것처럼 군데군데 번져 있는 모습이 제법 멋드러졌다. 조선 어느 화가의 그림첩에 나올만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진보다 더 멋지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아니면 원래 그런지) 사진이 잘 안 받는 날이다. 


길게 이어진 계단들. 둘레길을 걸으면서 최근 몇년간 가장 많은 계단을 오르내렸다. 아직은 무릎이 큰 이상없이 버텨주어서 다행인데 발바닥 통증은 어느 정도 거리를 걸으면 금세 재발하기 때문에 여기쯤 와서는 꽤 속도가 느려졌다. 대략 5km이상을 걸으면 발바닥에 통증이 시작되는 것같은데 최대한 통증을 줄여주는 걸음법으로 천천히 걸어본다. 역시나 오늘도 화면 비율 버튼이 돌아가서 여기서부터 사진이 또 4:3이다.


멀리 보이는 의정부 시내의 모습이다.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산은 수락산이라 한다. 그러고보면 서울 주변에 참 산이 많기도 많다. 그만큼 가볼 수 있는 곳이 많다는 말이니 행복한 일이다. 이 사진은 파노라마로 만든 사진이니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보루길이라는 이름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좀처럼 현장에서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려워서 아쉬웠다. 설명하는 글을 읽다보면 참 어렵게도 썼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나 글은 쉽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데 어쩐 일인지 우리는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을 쓰는 것을 더 알아준다.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도 감탄의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지적 허영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내 글도 가만히 읽어보면 그리 쉬운 편은 아니어서 한 번 더 반성을 해 본다.


안골길에 비해 다닌 사람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눈이 아직 온전한 곳들이 제법 많은 구간이다. 저렇게 쌓인 눈을 보면 안으로 들어가 꾹꾹 밟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나이가 드니 나 자신에게 눈치가 보인다. 오가는 사람도 없으니 들어가서 눈장난이라도 쳐도 좋으련만 괜한 눈치만 늘었나보다. 대신 쪼그리고 앉아 한참 눈을 들여다본다. 참 신기한 존재다. 눈이라는 것은...


어떻게 바람이 불고 빗물이 흘러내리면 바위가 저런 모양이 될까? 산에 있는 바위들은 생긴 것도 특이한 것들이 꽤나 많고 이름도 희한한 것들이 많다. 이 바위는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해골바위 정도면 어울리려나? 그러고보면 산에 있는 온갖 이름들은 참 원초적인 것들이 많다. 생긴대로 보이는대로 이름을 턱 붙여놓는데 그 이름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정말 그렇게 느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속세에서는 쓰지 않는 표현들을 산에 오면 만날 수 있는 것도 산행의 잔재미 중의 하나다.


계단을 걷고 오르막을 올라 다리를 건너고 또 오르막을 오르고... 이번 구간은 그런 느낌이 내내 이어지는데 그리 긴 편은 아니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다. 게다가 눈까지 쌓여 있어 발걸음이 조심스럽기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하고 걸어야 하니 잠시 쉬는 틈에 보면 온몸이 뻐근하다. 운동부족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좀 더 자주 산행을 해야 하나 싶지만 과욕은 늘 화를 부르는 법.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은 이 추위에도 얼지 않았다. 손이라도 담가볼까 어디로 내려가야 하나 생각할 무렵에 앞쪽에서 여러 명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어 아쉬웠던 계곡물. 삼각대를 가져올 생각을 못했기에 흐르는 물의 느낌을 살리지 못한 게 아쉽기도 했다. 사진이란 보통 한 순간을 멈추어버리기 때문에 기억들 역시 하나의 조각으로 존재한다. 저속 셔터는 그런 조각을 조금 늘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제 보루길도 막바지다. 구간 난이도는 높지만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아 큰 어려움없이 걸을 수 있다. 여기쯤 오니 시간이 11시가 조금 넘었다. 일어난 지 5시간만에 여기까지 이른 셈이다. 집에서 의정부까지 오는 시간이 2시간이 넘게 걸렸으니 2구간을 모두 걷는 데 대략 3시간 조금 넘게 걸린 셈이다. 3시간 정도의 걷기는 비록 산길이기는 해도 크게 무리없는 걸음이다. 발바닥 통증은 이젠 치료보다는 덜 아프게 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에 걷기나 산행을 멈추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곳에 적멸보궁이 있다니 조금 놀랐다. 그리고 이제 둘레길이 다시 서울로 접어든다. 서울의 동쪽 가장자리에서 출발해 한바퀴 빙돌아 경기도를 거쳐 다시 서울로 들어가게 되는 것. 새삼 멀리 돌아돌아 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 전체가 71.8km니 이제 50km 조금 넘는 거리를 걸어왔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다. 걸어온 거리보다 걸어온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그 마음을 고이 접어 담아 둔다.


17구간 다락원길을 알리는 팻말을 보며 오늘 걸음을 마무리짓는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기분이 조금은 가라 앉은 그런 날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은 탓이다. 나 혼자만 열심히 하고 힘을 낸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 현실에 자꾸 부딪히다보니 다소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 앉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인지라 그것이 요즘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 둘레길을 걸은 것은 그런 현재의 모습에 대한 반성 그리고 짧은 시간과 거리지만 무언가 이루어낼 수 있고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을 나 자신에게 일러 주고 싶어서였다. 하루하루 크게 변하지 않는 일상을 보내다보면 쉽게 마음이 지쳐버린다. 어디까지 가야하지? 얼마나 더 가야하지? 알 수 없는 막연함에 기운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길게 보면 지금의 이 순간들은 둘레길의 한 구간만큼이나 짧다. 한 구간을 내 발로 힘을 내 걸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도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

내가 산행을 시작한 이유. 아마도 가장 큰 것은 이것이지 싶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는 겸손. 이 두 가지가 나를 계속 산으로 이끈다. 앞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은 어디든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해 본다. 둘레길은 아마도 2월 정도면 전 구간을 마치게 될 것 같다. 전체 걸음을 마치더라도 몇몇 구간은 다시 걸어볼 생각이다. 그 구간을 걸었던 계절과는 다른 계절에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그런 구간들이 몇곳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 번 끝을 냈다고 해서 다시 돌아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Panasonic LX5



한동안 가지 않고 미뤄두었던 둘레길을 걸었다. 걸은 코스는 두 코스 13구간과 14구간이지만 우선 13구간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14구간의 이야기는 며칠 후로 남겨둔다. 둘레길 걷기가 중반을 넘어서 종반에 이를 수록 뭔가 마음속에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중에라도 다시 걸을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전 구간은 하나씩 차례로 걷지는 않을테니 이번 걸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3구간 송추마을길은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르면 난이도는 '하'이고 전체 거리는 5.3km, 소요시간은 약 2시간 40분이 걸리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위의 기록을 보면 실제보다 거리가 약간 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길의 중간지점에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내가 걸은 길이 지정된 경로가 아닌 조금 구간을 단축하는 길이 몇 군데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고도도 낮은 편이고 평지가 더 많은 구간이라 걷기 수월한 구간이다.


송추마을길은 이전 글에서도 적었지만 충의길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번에 걷다가 중지한 지점에서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아침에 짐을 꾸리며 아이젠을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넣기로 했는데 나중에 14구간을 걸을 때 제법 도움을 받았다. 겨울산에는 아이젠, 스틱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장갑 두 벌 정도와 바람막이 하나, 귀마개, 게이터, 바라클라바, 양말, 약간의 음식과 패딩 정도는 가져 가야 하니 배낭이 클 수밖에 없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여간해서는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는데 겨울에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크기는 딸랑 22리터다. 본격 산행이 아닌 둘레길 걷기인 까닭도 있다. 물론 오늘 저런 것들을 다 들고 간 것은 아니다.


역시나 시작은 밋밋한 도로인지라 이 도로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산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13구간을 걷는 분들은 구파발 역에서 내린 다음 34번이나 704번을 타고 석굴암 입구에서 하차하면 된다. 전체적으로 바람은 불지 않는 날씨여서 가벼운 복장이었지만 그리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 산행은 땀과의 싸움이고 옷갈아입기의 부지런함 정도에 따라 버티느냐 아니냐가 정해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위의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이제 도로를 따라 걷는 일은 별로 없다. 의정부 방향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보니 내가 멀리 오기는 꽤 멀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 안내 이정표의 맨 아래에 오봉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그곳의 이야기는 한참 아래에 나온다. -하지만 뭔가 기대를 할만한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시골의 어느 마을길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둘레길 사진이 전체적으로 우중충해보이는데 역시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눈이라도 없다면 어딜 가나 뭔가 화사한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볼 수 있다면 등산객들의 옷이 색깔 정도일까. 하지만 겨울은 다른 계절이 줄 수 없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송추마을길에는 제법 많은 군부대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주변에 묘지가 많아 군부대에 나름 여러 괴담(?)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도 별별 괴담이 다 있는데 지금 생각나는 건 빨간 부츠 신은 여자아이 이야기 정도다. 아무튼 이 주변의 묘역들은 제법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어느 묘소 근처에는 바로 위에 초소가 있던데 그 초소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는 뭔가 이야기들이 제법 많으리라.

이제야 볼 수 있는 것이 송추마을길 진입문이다. 이제까지 송추마을길이라고 알고 걸어왔던 것은 충의길도 송추마을길도 아닌 애매한 구간이었던 셈이다. 이런 부분은 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워낙 광범위한 지역을 둘레길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으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중간중간의 안내가 좀 더 치밀하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본격적인 송추마을길의 시작이다. 제법 산다운 느낌이 들지만 이 구간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구간이다. 딱히 힘들다거나 곤란한 지점도 없고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나가면 된다. 오늘은 날씨마저 워낙 흐린 탓에 우중충한 겨울의 분위기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게다가 오고 가는 사람도 하나 없어 오후에라도 왔었다면 조금은 음산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제대하신 분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지 싶은데 이 구간 내내 이런 표지들이나 진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주변이 거의 다 군부대기 때문이다. 크레모아는 저렇게 글만 보면 사실 별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격발이 되면 참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무기다. 신교대 교관 시절 저 녀석을 한 번 터뜨려본 적이 있는데 참.. 전쟁이 정말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길은 이런 오솔길과 몇 군데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여름이나 가을날이었으면 제법 화려한 색상들과 마주치며 정겨운 느낌을 듬뿍 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닐까 싶지만 역시 겨울에 만나는 산길이란 지난 시절의 흔적들이 바닥에 짙게 깔린 무언가 다른 시간을 준비하는 잊혀져 가는 시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어서 쓸쓸한 느낌을 걷는 내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겨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왜 나무는 하늘을 보고 자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는데 굳이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에도 그런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수 없이 마주 하는데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다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과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이 사진을 보시면 분노(?)할 예비역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니 진지공사를 어떻게 했길래?"라며 말이다. 군인들에게 봄가을 진지공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그래도 저 정도면 꽤나 열심히 잘 만든거다. 쓸 데도 사실 없는 것을 왜 힘들여 작업을 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소위 FM 즉 Field Manual이다. 원칙이 있어야 그 원칙에 따른 융통성이 생기는 법이다. 당장은 무익한 듯 해보이지만 결정적일 때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곳이 오봉탐방지원센터다. 내가 오늘 이곳을 벼르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둘레길 열쇠고리를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남은 구간을 올해 안에 완주하기는 일단 어려운데다가 탐방센터들이 어쩐 일인지 내가 가는 날마다 문을 닫고 있어서 이곳은 열었을까?라는 호기심도 한몫 했다. 다행히 이곳은 오늘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 서니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 한 분과 묘령의 미모의 처자가 한 분 계셨다. 

나: "스탬프 투어 확인 받으러 왔는데요"

처자: "네~ 다 도셨나요?"

나: "아뇨, 13구간까지만요. 올해 안에 다 못 돌 것 같아서 열쇠고리라도 받으려고요"

아저씨: "에이 하루에 3구간씩 돌면 금방 다 돌텐데 아깝네" 라며 인상 좋은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셨고 처자와 둘만 남은 상황..

처자: "네~ 사진 보여주세요. 어머! 알아보기 쉽게 정리를 잘 해두셨네요"

나: '제가 정리 하나는 잘 하는지라'라고 생각만...

여기까지는 화기애애하고 괜찮았는데 처자분이 스탬프를 찍다가 잉크가 터져 왼손이 푸른색으로 온통 변색이 된 다음에는 좁디 좁은 그 사무실 안에는 적만만 감돌았다. 

나: "저런, 제가 괜히 많이 가져와서 이런 일이"

처자: ...................

이후 괜히 농담도 꺼냈봤지만 대답 없던 처자분... 잉크라 좀 오래 가겠지만 언젠간 지워지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받아온 열쇠고리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북한산둘레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고 온전히 내 걸음으로 얻은 것이기에 그 소중함은 남다르지 싶다. 한 구간만 더 걸으면 탁상시계와도 바꿔준다지만 내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완주할 생각이고 그럴 거라면 완주 기념품이 낫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시작을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부담을 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어서 열쇠고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이었다. 배낭에 걸어두면 그럭저럭 어울리지 싶은데 아직 앞 부분의 칠이 마르지 않아 끈적끈적하다. 며칠 숙성시켜두면 나아지겠지.


오봉탐방지원센터 주변으로는 뭔가 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변이 온통 어수선한 느낌인데 무슨 이주단지라 하던데 이곳에 새로 아파트나 그런 것이 들어서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산 주변으로 자꾸 사람들이 모여 드는 것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갈 수록 산이 산으로 조용히 서 있기도 힘들어진다.


다시 만나게 되는 도로. 여기는 국립공원 주차장이 있는 곳인데 이곳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제법 큼지막하게 만들어 두었다. 역시 평일이어서 한산한 모습이다. 겨울 산행은 확실히 손이 많이 간다. 양손에 든 스틱에 카메라에 장갑까지... 카톡이라도 오면 멈춰서 장갑 벗고 확인하고 해야 하니 부산스럽다. 게다가 옷도 땀이 나면 벗고 추워지면 입고를 꾸준히 반복해야 하니 가장 부지런히 움직여야하는 산행이 겨울산행이 아닐까.


군부대 앞에 저렇게 둘레길이라고 표시를 해 둔 것이 왠지 귀여운 느낌도 든다. 이 지점까지 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더 진행을 해서 다음 14구간에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왼쪽으로 가 버스를 탈 것인지 말이다. 14구간은 난이도가 '상'이다. 북한산둘레길에서 난이도가 '상'인 구간은 단 세 곳뿐이다. 그곳 중의 한 곳이 바로 다음 구간이니 생각을 잘 해야 한다. 특히 겨울산에 과욕은 금물이다. 


멀리 사패산을 바라보면서 걷다 보면 13구간도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 든다. 교통표지판에 의정부, 구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서울의 오른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모양이다. 처음 서울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시작한 둘레길 걷기가 다시 원점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도 해 본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날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맑고 투명하기만 하다. 여기까지 오면 전체적인 기온이 조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점점 산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르막을 따라 조금 걸으면 14구간 산너미길의 시작이다. 두 구간을 모두 걸었지만 이번 포스팅은 13구간만으로 마무리한다.

오늘 걷기는 전반적으로 겨울 산행을 위한 예행연습 같은 느낌으로 준비도 했고 그렇게 움직여보는데 의미를 두었다. 평소 들지 않던 스틱도 들고 교과서대로 사용도 해보고(덕분에 손목이..;) 아이젠도 수시로 채웠다 풀었다 해 주고 배낭도 동계용으로 꾸려서 다녀봤는데 역시 다른 계절에 비해 정말 손이 많이 간다. 가장 문제는 몸에서 흐르는 땀과 바깥의 기온과의 차이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동계 산행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리하지 말 것이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오늘 오르지 못 하면 내일 오르면 그만이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겨울산이다.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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