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17일 정확하게는 11월 18일 새벽 1시경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이 들어 있을 무렵 광무황제(이하 고종황제)의 처절한 외침을 뒤로 하고 일본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한 장의 종이에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우리가 을사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을사늑약은 이렇게 황제의 승인도 없는 가운데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친일파들의 손에 의해 처리되고 이 늑약을 시작으로 500년을 이어온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은 종말로 치닫게 된다. 이 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일본의 식민지로 빠르게 편입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치욕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장소가 바로 이곳 덕수궁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한자로 重明殿이라 적는데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중명전이 세워진 것은 1897년으로 바로 대한제국이 성립된 해기도 하다. 러시아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건물로 당시에는 황실도서관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명전이 우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 을사늑약이 강제되었고 고종황제에 의해 헤이그 특사가 파견된 장소이며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장소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래 두 번이나 화재로 건물이 모두 타버리는가 하면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혹은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시가 1983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하고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한 것을 2006년에 문화청이 넘겨 받아 2007년에 사적 제 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2010년에서야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이 완료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1897년 건축된 이래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제모습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니 한편에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반에 개방된 것은 지난 2010년부터다.


현재의 중명전은 덕수궁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1910년 당시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넓은 면적이었는데 1919년 고종황제 승하 후 여기저기 전각이 해체되면서 원래 면적의 거의 절반 크기로 줄어 들었다. 중명전 역시 당시에는 덕수궁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덕수궁과 이어지지 않고 정동극장 뒤켠의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수궁과 이곳을 어떻게든 이어 덕수궁을 찾는 이들이 이곳을 반드시 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중명전은 2층 건물인데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올라갈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병력으로 고종황제를 억압하며 대신들에게 조약에 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 때 대성통곡을 하며 끝까지 반대를 하다 2층 어느 방으로 끌려간 한규설 참정대신의 흔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8대신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 이들 즉 우리가 기억하는 을사오적의 손에 을사늑약이 맺어진다. 늑약이란 한자로 勒約이라 적는데 '굴레 륵'자에 '조약 약'자를 적어 강제로 맺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최근 들어 정부 어느 부처인가에서 출판사에 중등 교과서에 적힌 을사늑약을 전부 을사조약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다.


좌우로 3개의 방을 만날 수 있는데 왼쪽에 한 개 오른쪽에 두 개의 방이 있다. 왼편의 방으로 들어가면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로 알고 있던 날짜가 사실은 18일이었음을 오늘 이곳을 방문하고야 알게 되었다. 관심 부족이 무엇보다 큰 이유겠지 싶다. 그까짓 1일 정도가 무슨 상관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을사늑약이 18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체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정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국가간의 조약이 새벽 1시에 체결된다는 말인가


을사늑약의 복제본을 만날 수 있다. 제2조를 보면 "한국정부는 이 조약 이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온전히 넘겨주게 된다. 즉 한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중요하고도 처절한 문서가 작성된 곳이 이곳 중명전이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하야시 곤스케의 도장이 보인다. 박제순은 당시 고민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이후 승승장구하며 일본에 충성을 바쳐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의정까지 거치면서 자손대대로 풍족하게 지냈다고 한다. 을사오적으로 이완용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인물이 또한 박제순으로 친일파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중명전의 모형과 당시의 사진들 몇 점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보, 보물, 사적 등의 관리가 대체로 불만족스러운 것은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일텐데 중명전 역시 좀 더 효과적으로 관리를 할 수는 없을까라는 아쉬움이 문을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개인이 관리하는 곳도 아니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말이다. 문화재청을 '부'로 승격해도 모자랄 일이다.


오른쪽의 두 번째 방은 작은 방 하나와 큰 방 하나가 이어져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방에서는 을사늑약 당시의 해외 보도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사진 오른쪽 구석에 벽난로가 보이는데 벽돌로 꼭 막아두고 있어 조금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명전 자체를 이렇게 전시공간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대로 복원을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라는 점을 빼면 사실 무언가 당시를 돌아볼만한 "꺼리"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을미의병(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잠시 활동이 뜸했던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애국계몽운동이 본격화된다. 사진 맨 오른쪽에는 늑약 체결 3일 후에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이 보인다. 장지연에 대해서는 애국자냐 친일파냐 워낙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자세히 적을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만큼은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진 문으로 들어가면 늑약체결 이후 고종황제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어 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고자 한 노력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헤이그 특사'라고 부르는 세 분 즉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그들이다. 강대국들의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었던 당시 회의에 결국 특사들은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게 되고 이준은 헤이그에 더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원인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가 우리 근대사에서 또 중요한 이유는 일제가 이를 빌미 삼아 고종황제를 퇴위시켰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황제를 온갖 협박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것을 도운 것 역시 우리나라 사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씁쓸한 일이다. 당시 송병준은 "동경에 가서 사과하던지 자결하라"고 황제를 협박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 세 분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의연하고 떳떳한 모습이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순종황제의 즉위와 소위 한일신협약이라 불리는 정미7조약 등이 일사천리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대한제국은 이때 군대마저 해산되게 되는데 외교권에 이어 나라를 지킬 군사력마저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3년 후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제국에 병합되고 만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콘텐츠지도, 덕수궁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참고서적: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4. 이영철, 한국사총론, 메티스, 2012.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897년 건축 사적 제124호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1-4 중명전

평일 오전은 제한없이 관람할 수 있지만 오후와 주말은 선착순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

덕수궁 및 중명전 홈페이지 


중명전에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 내려 덕수궁 방향으로 나가 대한문을 바라보고 왼쪽길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이곳이 바로 정동인데 정동에는 우리 근대사의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장소다.


가을의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라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좌우로 근대사의 조각들이 조금씩 흩어져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 배포하는 '다같이 돌자 정동한바퀴'라는 안내 소책자가 있는데 지도와 해설을 잘 담아놓고 있으니 덕수궁이나 중명전에서 한 부 얻도록 하자.


오른쪽에 정동극장이 보인다. 정동 자체가 워낙 이런 시설들이 넘쳐 나는 공간이다보니 글 하나에 모두 소개하기란 벅찬 일이다. 정동의 우리 유산들은 천천히 한곳씩 소개해 나갈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로만 그치기로 한다.


정동극장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에 중명전으로 가는 안내 푯말을 볼 수 있다. 평소에는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것인데 막상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가니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이길을 지나시는 분들은 눈 여겨 보셨다가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길을 따라 약간만 올라가면 중명전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생각보다 외진 데 있고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지만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 덕수궁 중명전"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 Panasonic LX5



이 장대한(?) 프로젝트를 이제야 옮기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 녀석과 "우리 대학에 들어가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들을 찾아보자" 라는 작은 약속을 했었지요.  그런데 둘 다 대학에 똑 떨어지고 저는 어찌어찌 해결을 했지만 그 녀석이 무려 4수를 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어느샌가 잊힌 기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이 분주하게 지나면서 그 시절의 소박한 그러나 정말 하고 싶었던 그 꿈은 '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지'라고 이야기하는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죠. 하지만 이제 비록 혼자지만 그 생각을 옮겨 보려 합니다. 이대로 미뤄두기엔 너무나 아까운 어린 날의 바람이었기 때문이고 우리 역사를 잘은 모르지만 막연하게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라면 독거노인인지라 일상이 조금 자유롭다는 것 정도일까요?

블로그 카테고리는 일단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보는 현재 310 여개가 있고 보물은 1,700여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적지는 510여군데가 됩니다. 단순한 계산으로는 대략 2,500가지가 됩니다. 하루에 하나씩 찾아가면 6.8년이 걸리지요. 제가 로또에 당첨이 되어 먹고 사는 걱정이 없다면 7년 정도 계획을 잡고 이 작업을 해보겠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지요. 하지만 저 2,500가지 중에 현실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숫자는 제법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시작은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시대적 배경은 근현대사부터 시작할 생각이니 생각보다 숫자는 아주 줄어들지 않을까 싶네요. 언제 끝이 나는 작업이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하염없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죽기 전까지 하다보면 제법 많은 우리나라의 유산들을 이 블로그 안에 모아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작업은 저 혼자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은 사실 불가분의 관계죠. 그러니 굉장히 멋진 사진이나 글을 기대하시는 분들께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습니다. ^^;

고민 중인 것은 글의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인데 디자인은 영 할 줄 모르는데다가 그럴만한 시간적 여건도 지금은 부족한지라 일단 손이 가는대로 적어보고 진행이 되는 과정에서 손질을 해볼까 합니다.  '그냥 하면 되지 뭘 글까지 쓰나?' 싶기도 하지만 제 자신에 대해 목표 의식을 부여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갑자기 블로그에 역사 유물이 등장하게 되면 궁금해하실 분이 혹시 계실까 싶어 적어 봅니다.

그냥 글만 적기 뭐해서 오래 전 찍은 사진을 한 장 같이 올립니다. 많이들 보신 경복궁 경회루입니다. 1412년 건축되었고 대한민국 국보 224호입니다. 국보 지정은 1985년 1월 8입니다. 이글에는 이 정도로 그치겠지만 다른 글에서는 좀 더 상세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적어볼까 합니다. 물론 기존의 교과서들을 많이 참고해야겠지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벌써...;

한 가지 바람이라면 우리 유산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많았으면 합니다. 외국에 알릴 우리만의 고유한 무엇들이 지금은 너무나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첨단 스마트폰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주였으면 합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요? 초등학생들도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인데도 그런 것들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것들조차 사라져가고 있지요. 국수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뿌리는 알고 살면 어떨까 하는 바람입니다. 아마 글의 시작은 내일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내일 가 볼 곳은 서울의 중심부의 어느 동네인데 생각보다 이곳을 아는 분은 극히 적으리라 생각이 되는 장소입니다. 


한국사검정능력시험이라는 시험이 있다. 아는 분들은 알고 모르는 분들은 또 모를 그럴 시험인데 적어도 수험생들에게는 익숙한 시험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알고 한글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실제로 그러질 못 하니 시험으로까지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관리하는 곳은 국사편찬위원회다. 다만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전용 홈페이지로 가야 한다.

자, 민족을 안고 세계로 가려면 국사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시험이 만만한 시험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국사를 열심히 배우지만 막상 시험이라면 꺼려진다. 토익처럼 말 그대로 국민시험도 아니다보니 선뜻 응시하기가 어렵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아래 표와 같이 급수가 나뉘는데 소위 어디 명함 좀 내밀려면 고급은 통과해야 한다.

50문제인데다가 5지 선다형이다. 제한시간은 80분. 문제를 읽고 뭔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듯이 지문을 보고 바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험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까? 

이미 시중에 이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많은 교재들이 있다. 게다가 공무원 시험 과목이기도 하니 자료는 그야말로 바닥에 깔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책을 잘못 고르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크게 낭비다. 수험생들에게 입소문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책 한 권을 소개해볼까 한다.

책 제목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조금 난감하다. 시험 이름이 그대로 책 제목이다.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문제 고급 1·2급"이다. 풀판사는 운전면허시험을 치러본 사람들이라면 친숙한 크라운출판사다. 저자인 최영욱 강사는 이 바닥(?)에서는 제법 유명하다. 특히나 동영상 강의가 인기인데 홈페이지에 가 보면 시범강의를 볼 수 있으니 들러보도록 하자.

본문은 컬러풀하다. 각종 유물들과 지도 등을 컬러 사진으로 싣고 있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역사 공부에 흥미를 붙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책의 구성방식은 개조식 서술에 가깝다. 이건 읽는 이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빠르게 흐름을 잡으려는 이들에게는 적당한 방법이다. 단원마다 실제 기출문제를 싣고 있어 어느 부분을 강조해서 공부해야할지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종이질은 약간 광택이 나는 재질인데 컬러 인쇄를 배려한 방식이지만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한 부분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구성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역사라는 과목의 특성상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 학습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테마별로 정리를 해야 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책은 그런 면에서 초심자가 빠르게  역사의 흐름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 있고 어느 정도 학습이 이루어진 수험생이 막판 반복학습을 할 때 적당할 정도의 분량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역사 시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료들을 책 날개 부분에 따로 뽑아 두고 있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서 문항으로 바로 반영되기 쉬운 부분이다보니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데 별도로 지면에서 독립시켜 두고 있어 사료 자료만의 독립적인 학습도 가능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라!"

중간중간에 형광펜으로 칠한 듯한 부분은 저자가 특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으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니 세밀한 학습이 요구된다. 이 표시들만 죽 훑어봐도 전체적인 내용의 강약조절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압축된 내용의 교재라도 결국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강사가 강조한 부분과 자신이 판단한 부분을 잘 조화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글만 써 있다면 이해도 안 되고 암기도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376페이지라는 분량으로 고급을 통과하기에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압축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의 분량이야 늘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무한정으로 늘릴 수 있지만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시험장에서 결국 필요한 것이 서브노트와 같은 얇은 분량의 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연표다. 책 뒷면에 고이 접혀 있는 연표를 펼치면 전체적인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꽤 넓고 큰 데다가 빈 공간이 많은 편이니 벽에 붙여 두고 그때그때 보면서 추가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을 첨부해 나가면 자신만의 좋은 압축 학습 교재가 될 것이다.

이책을 구입하면 동영상 CD와 인강 30% 할인쿠폰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책은 인강과 동시에 공부할 때 효과가 배가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강사 본인의 강의의 핵심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자 그럼 실제로 강의와 책을 어떻게 조화시키면 좋을지 최영욱 강사의 샘플 강의를 들어보자. 


구석기시대 from Realhistory on Vimeo.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시는 곳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는 어제 비로소 이곳을 발견을 했습니다. '누리의 취재노트'라는 이름의 블로그입니다. 이 블로그에 일단 들어가면 한동안 거의 빠져나올 수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 녀석과 꿈꾸던 일을 직접 실천하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3때 친구와 한 이야기는 대학에 들어가거든 전국에 있는 국보와 보물을 찾아다니자는 것이었는데 저는 바로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친구는 결국 3수를 했지요. 이리저리 삶에 치이다보니 친구와 연락도 뜸해졌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유물을 직접 찾아가보고 싶었던 것은 나름 역사에 대한 관심도 컸고 일단 우리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금 보면 우리나라는 과연 우리 고유의 것이 무엇이 남아있는지 솔직히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직 꿈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누리 님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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