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묘비 앞에 서 본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묘비에 묻는다면 죽은 이들은 무어라 대답을 할까.. 그것도 본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세상을 등져야 하는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 그네들이라면 무어라 대답을 할까.. 어느 바람이 차갑던 날의 묘비는 치열한 겨울의 얼음보다 더 차가운 체온을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삶에 있어서... 끝끝내 안고 가야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준다. 결국 삶이란 어떤 이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되고 그것으로 한 사람은 충분히 살아갈 의미와 이유를 얻게 된다. 그런 이유마저 없다면 결코 내 의지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닌 이 삶이라는 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번의 삶에 있어 그런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축복에 가까운 일...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나로 인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거나 그 의미가 되는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나면 마치 온몸의 살점이 다 사라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몰아치는 겨울밤의 찬바람을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바람이 내 뼈마디마디를 스치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는 그런 "내"가 되고 만다. 너무나 차가운 바람에 마음의 조각조차 뼈마디에 붙어 있기를 힘겨워하며 비명을 내지르곤 한다. 하지만 바람은 그런 나를 더 세게 몰아칠 뿐이고... 마침내 바람소리에 내 비명마저 잠겨 들어 어느 샌가 "나"의 작은 소리조각조차 남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바람은 잦아든다.

차가운 얼음대지에 주저 앉아 텅빈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어느 한 곳 내가 기댈 곳 없는 오직 광활한 - 사막보다도 넓은- 공간이 나를 사방에서 압박해옴을 깨닫게 되고 어떤 방향을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일어서 한참을 달리다 숨이 턱에 걸려 쓰러지고나면 무엇때문에 지금까지 삶을 이어온 것인가 또 한 번 하늘을 우러르며 이젠 흐르지도 않을 눈물을 흘려본다. 

내가... 내가 이 짧은 생에서 원한 것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누군가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어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하늘이 "나"를 버릴 정도로 가져서는 안 되는 꿈이고 희망이었나. 차가운 묘비에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려보아도 그저 묘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다시 내 발치로 흘러흘러 나를 감쌀 뿐이었다. "잃는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와 같은 말임을 비로소 깨닫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도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어 묘비 주위를 서성인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나는 너를 보낸 적이 없다. 뼈마디를 스치고 지나가던 그 날카롭던 겨울의 어느 바람에도 끝끝내 내가 놓지 못한 것은 너의 웃음과 너의 말투와 너의 체온... 비록 눈물이 차가운 얼음조각조차 되지 못한 채 영원히 묘비 주위를 맴돌뿐이지만..그래서 끝끝내 다시는 너를 마주하지 못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너를 놓은 적이 없다. 소월의 어느 싯구처럼 그렇게 부르다 내가 죽을 그런 이름이 되어 있을 뿐...

너와 나는... 그렇게... 내가 묘비가 되어 있거나 혹은 네가 묘비가 되어 있을 뿐... 

그리고 다시 손을 댄 묘비는 어느새 내 체온과 같은 온도가 되어 있었다...


Nikon F3hp, Ai Nikkor 35mm f/1.4S, Kodak T400CN,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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