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제대로 된 미술관 안내서적을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495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 놀랐고 사진의 질을 높이기 위한 종이를 사용하다보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또 놀랐다.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출퇴근 길에 읽기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 

그럼에도 이책은 재밌다. 미술관을 소개한 책이 무슨 '재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류의 책들을 여러 권 읽어 봤지만 이책만큼 몰입감을 준 책은 드물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선 머리말이 길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머리말이 긴 것은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픈 말이 오죽 많았기에 이렇게 구구절절 써 놓았을까 싶어 정독을 했다. 역시나 저자는 할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저자 본인이 여행 카다록에 나와있는대로의 잘 짜여진 모범 코스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보고 느낀 아쉬움에서 이책을 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책에 실린 미술관들이나 작품 그리고 작가들에 대한 소개가 제법 심도 깊고 정말 필요한 정보들로 채워 넣었음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부분만이 아닌 비하인드 스토리랄까..독자의 흥미를 끄는 요소를 많이 다루고 있는 점도 장점이다.

저자의 미술관 기행은 영국에서 출발한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현대 미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치 갤러리의 비중은 어느 미술관 못지 않게 크기 때문에 가장 먼저 집고 넘어 간다. 영국을 출발해 프랑스로 그리고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으로 이어진다. 뒤의 세 나라는 미술관이라는 시각에서만 보면 우리에겐 조금 낯설 수도 있는데 저자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둔듯 제법 상세하게 그 나라들의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소개 덕분에 소위 문화 선진국들에 국한된 지식의 폭을 꽤 넓힐 수 있었다. 애초에 잘 알려진 미술관이 없는 나라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총 16개의 미술관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술관은 채 몇 개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문화에 대한 편식도 제법 심한 편이 아닌가 싶었다.



이책의 하이라이트는 독일의 홈브로이히 박물관이다. 읽는 이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이 미술관의 소개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지식을 버리고 당신의 눈을 믿어라'는 문장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미술 작품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를 생각해보자. 모나리자를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학교 혹은 기타의 경로로 배운 '지식'을 먼저 생각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떻고 그림의 배경이 어떻고 작품이 있는 미술관은 어디고 등등...

홈브로이히 박물관은 그런 우리의 모든 배경 지식을 무시해버린다. 아무런 표제도 없이 그저 작품만 있다. 판단은 보는 이가 하면 된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시를 분석하는 것이 참 마음에 안 들었었다. 윤동주의 시는 무조건 저항시라던가 하는 식의... 시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시어들을 시험에 적합한 문제로 만들어 외우던 시절... 그런 편견 속에서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읽지 못 하고 지나쳤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낭만파니 인상파니..하는 이론들에 묻혀 정작 작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진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사실이었다.이책을 읽어 내려 가면서 그런 선입견들이 얼마나 예술 작품을 오해하게 하는데 크게 작용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이책을 제대로 읽어 내것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마음 같아서야 직접 소개된 미술관들을 찾아 내 마음의 눈에 비치는 대로의 감상을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여건이 아쉽다. 여느 안내서를 읽었다면 책을 읽고 나서 금세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책을 읽어 가면서는 실제로 미술관을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진들을 담고 있음에도 아쉬움이 큰 것을 보면 작가의 의도가 책에 잘 반영이 된 모양이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저자가 찍은 사진들만 별도로 부록 형식으로 모아봤으면 어떨까 싶다. 본책이 워낙 무게가 나가는 이유도 있지만 때로는 글 조차도 잊고 작품만을 보고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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