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식은 입춘대길이 붙어 있는 몇몇 대문을 지나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24절기가 지난 것만으로 '봄'을 단정짓기에는 이른 요즘이다. 행여 봄을 알려주는 다른 소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우체통을 들여다보지만 되려 지난 겨울의 흔적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사래를 치게 된다. 계절만 놓고 보자면 내게는 봄보다는 겨울이 더 애착이 가는 계절이지만 봄은 그 어정쩡한 날씨와 분위기를 잊게해 줄 '시작'이라는 의미가 강한 까닭에 그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없지는 않다.

이젠 주변에서 우체통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는데 이런 모양으로 우체통을 재활용하고 있으니 자원의 재활용이라는 면에서는 칭찬해줄 만하지만 왠지 모를 어색함은 좀처럼 감추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은 내게는 여러가지 인연이 많은 길인데 혼자 한 번을 걷고 아내가 될 이와 한 번을 걷고 오늘 또 한 번을 걷는다. 길이 있어 걷는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 이 길이 내게 주는 각별함은 그런 것이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아직 태양의 열기가 땅을 다 녹이지 못하는 시간인 까닭에 난간 그림자가 걸쳐진 곳에는 지난 새벽의 서리가 그대로 남아 아직 겨울이 건재함을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 겨울이 이제 끝물에 접어 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듯 완전한 끝과 완전한 시작이란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끝이 동시에 시작이고 시작이 동시에 끝인 경우가 우리네 삶 전체를 이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지 않을까. 그 자연스러운 흐름. 이어짐 속을 걷는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

이 '위험' 표지판은 누가 누구에게 경고를 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머리가 부딪히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일까. 나무에게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일까? 이해의 시작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내게 던지는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가끔 내 기분에 취해 나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는 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겨울은 아직 이렇게 산의 곳곳에 남아있다. 눈의 흔적을 서울에서 찾기는 이제는 어려워진 탓에 이 정도의 서리라도 반가운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올 겨울에는 눈 위를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걸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본격적인 봄이 오기 전에 춘설이라도 내려주기를 바라지만 속절없는 일기예보는 비소식만을 전하고 있으니 다음 계절을 기약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낮이 가까워오니 완연한 봄날씨다. 입고 간 겉옷은 이미 배낭에 넣었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죽 뻗은 길을 걷는다. 길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정해진 틀을 따라 가야하는 상황에서도 늘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길을 벗어난 다른 길은 어떨까 라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도 없지는 않지만 이미 만들어진 길만을 걷기에도 인생은 짧다.

참 오랜만에 여유롭게 돌아본 북한산둘레길이다. 모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꾸리고 집을 나섰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제대로 걸을 시간이 없었는데도 다시 찾은 길은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 나를 반겨주었다. 자연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이 아닐까 싶다. 언제고 돌아가 그 품에 안길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그 자연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오늘 걸음은 오랜 친구와 함께 했다. 한 때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 했던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을 만들어주었던 카메라. 아마도 그 기억때문에 들고 다니기 불편하고 무겁기만한 이 녀석을 손에서 놓지 못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이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과 가장 비슷하다는 35mm 렌즈... 두 친구 덕에 좀 더 행복했던 걸음이었다. 


Nikon D700, AF 35mm f/2.0D, iPhone 5S


예전에 잠시 알고 지내던 아가씨가 자기는 10년마다 자기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더군요. 10년이라는 세월을 잘 살아준 자신에게 주는 기특함에 대한 선물이라고요. 그때 그말을 듣고 참 저도 그 아가씨가 기특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진도를 더 나아가볼까 했지만 워낙에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 연애나 그 이후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기에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요...)

아무튼 저도 2014년을 맞아 저에게 뭔가 하나 주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해는 참 개인적으로 버거웠던 그리고 어쩌면 제 인생에게 뚝 떼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힘든 해였고 온전히 저 혼자 버텨나가야했던 해였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뭐를 제게 줄까 생각하다가 우연치않게 이 녀석을 들이게됐습니다. 워낙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은지라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솔로로 지내면서 딱히 전화를 쓸 일이 없어 휴대폰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가 봅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반려동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금은 쓸쓸한 일입니다. 애정을 둘 대상이 사람인 것이 가장 좋은 것인데 그러질 못 하고 다른 '대상'에 의미를 주는 것이니까요. 사람에 의한 어떤 상처가 있건 그 상처는 특정 사람으로 인한 것이지 또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니기에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겠지요.

말은 그렇지만 저도 그것을 잘 극복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무래도 신뢰나 사랑 같은 내 감정을 온통 쏟아부은 경우에 후유증이 오래 가나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어떤 불편한 기억은 그 기억에만 한정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기억을 일반화해서 세상과 적대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겨울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고 주변의 일들도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그런 요즘입니다. 모두들 올 한 해 사람에게서 행복과 의미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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