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에로스
김열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는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존재다. 인류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가족이 필요하고 가족이란 남자와 여자가 합쳐 자식을 낳음으로써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도 유물론자들은 종족번식을 위한 가상의 감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분명 이성으로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종족번식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그럼에도 요즘은 어떤가? 늦은 밤 앞서 가는 여자와 뒤에서 가는 남자 모두 불안을 느껴야 하고 엘리베이터에 단 둘이라도 타는 경우가 생기면 서로 고개를 돌리기 바쁘다.

인터넷에서는 연일 남자의 군대이야기와 여자의 임신이야기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양성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자연적인 순리라면 요즘의 모양새는 양성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야단이다. 사정이 이러니 아예 독신을 선언하기도 한다. 가족을 만들기 위한 성적인 욕구가 아닌 쾌락을 위한 성적인 욕구가 판을 친다. 주객전도라는 말은 오늘날의 남녀관계에 잘 어울리지 않을까?


김열규 교수의 '한국인의 에로스'는 이런 시점의 우리에게 참 적절한 문제 제기를 해 준다. '에로스'라는 제목에 혹시 야한 이야기라도 나오지 않을까 책장을 펼치면 금방 후회하게 된다. 출판사도 지적하듯 "라틴어인 Eros는 사랑의 신을 가리키면서도 Amor와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사랑을 가리키기도 한다. 동시에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도 의미한다. 저자는 Eros가 이런 복합적인 뜻을 가진 점을 취해 남녀 간의 더 넓은 관계를 포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와 신화 속의 남녀 관계를 짚어 간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남녀관계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지만 문제의 제기와 풀이라는 경계조차 없을 정도로 유연하게 글을 이끌어 간다.

1. 한국의 남과 여 2. 짝짓기와 혼례 3. 또 다른 짝짓기 이야기 4. 사랑, 그 만다라의 얼굴 이렇게 총 4개의 커다란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목에 대한 선입관과는 전혀 달리 훌륭한 참고문헌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료와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다.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오늘날의 이야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조선 시대의 이야기가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고 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처음부터 죽 읽어 가자. 각 장마다 특별한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아무렇게나 마음 내키는 페이지를 펼쳐 읽으면 된다. 어느 곳을 읽어도 쉽게 빠져 들 수 있는 재미. 김열규 교수의 말빨(?)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김 교수는 왜 굳이 '한국인의'라는 부분을 강조했을까? 우리 사회가 현대화되면서 등장한 정체불명의 현대식 결혼식은 형식적이고 상업적이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괴물이 등장하면서 우리만의 고유의 남녀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혼례는 단지 양성이 만나 한 살림을 꾸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족과 가족의 만남,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정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인륜지대사라는 혼인의 형식이 그렇게 되었으니 혼인의 내용이 알찰 리가 없다. 김 교수가 개탄하는 점은 그런 것이 아닐까..

김 교수는 남녀 관계가 세상 모든 관계 중에 가장 까다롭고 성가시다고 한다. 그말은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경우가 있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어떨까?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혼인을 하고 살을 맞대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세상 어느 관계보다 대단한 관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어느 관계보다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진실되게 다가서야 하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남녀는 적이 아니다. 다른 성으로 받아 들이기보다는 둘이 합쳐 하나의 완성체가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신체적인 차이는 눈에 보이는 외양일 뿐이다. 오히려 그 외견 상의 차이를 결합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고 이전에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겠지만 인간 역시 자연이라는 커다란 역사 안에서는 그저 작은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받음이기 전에 베풂이란 것을 내세우고 싶습니다. 내가 받는 것보다는 상대방에게 주는 것에 더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이 바로 내 보람이고 기쁨이라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불변의 사랑의 철학일 것입니다." 김 교수의 사랑에 대한 일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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