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식은 입춘대길이 붙어 있는 몇몇 대문을 지나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24절기가 지난 것만으로 '봄'을 단정짓기에는 이른 요즘이다. 행여 봄을 알려주는 다른 소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우체통을 들여다보지만 되려 지난 겨울의 흔적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사래를 치게 된다. 계절만 놓고 보자면 내게는 봄보다는 겨울이 더 애착이 가는 계절이지만 봄은 그 어정쩡한 날씨와 분위기를 잊게해 줄 '시작'이라는 의미가 강한 까닭에 그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없지는 않다.

이젠 주변에서 우체통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는데 이런 모양으로 우체통을 재활용하고 있으니 자원의 재활용이라는 면에서는 칭찬해줄 만하지만 왠지 모를 어색함은 좀처럼 감추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은 내게는 여러가지 인연이 많은 길인데 혼자 한 번을 걷고 아내가 될 이와 한 번을 걷고 오늘 또 한 번을 걷는다. 길이 있어 걷는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 이 길이 내게 주는 각별함은 그런 것이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아직 태양의 열기가 땅을 다 녹이지 못하는 시간인 까닭에 난간 그림자가 걸쳐진 곳에는 지난 새벽의 서리가 그대로 남아 아직 겨울이 건재함을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 겨울이 이제 끝물에 접어 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듯 완전한 끝과 완전한 시작이란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끝이 동시에 시작이고 시작이 동시에 끝인 경우가 우리네 삶 전체를 이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지 않을까. 그 자연스러운 흐름. 이어짐 속을 걷는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

이 '위험' 표지판은 누가 누구에게 경고를 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머리가 부딪히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일까. 나무에게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일까? 이해의 시작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내게 던지는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가끔 내 기분에 취해 나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는 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겨울은 아직 이렇게 산의 곳곳에 남아있다. 눈의 흔적을 서울에서 찾기는 이제는 어려워진 탓에 이 정도의 서리라도 반가운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올 겨울에는 눈 위를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걸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본격적인 봄이 오기 전에 춘설이라도 내려주기를 바라지만 속절없는 일기예보는 비소식만을 전하고 있으니 다음 계절을 기약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낮이 가까워오니 완연한 봄날씨다. 입고 간 겉옷은 이미 배낭에 넣었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죽 뻗은 길을 걷는다. 길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정해진 틀을 따라 가야하는 상황에서도 늘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길을 벗어난 다른 길은 어떨까 라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도 없지는 않지만 이미 만들어진 길만을 걷기에도 인생은 짧다.

참 오랜만에 여유롭게 돌아본 북한산둘레길이다. 모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꾸리고 집을 나섰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제대로 걸을 시간이 없었는데도 다시 찾은 길은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 나를 반겨주었다. 자연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이 아닐까 싶다. 언제고 돌아가 그 품에 안길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그 자연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오늘 걸음은 오랜 친구와 함께 했다. 한 때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 했던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을 만들어주었던 카메라. 아마도 그 기억때문에 들고 다니기 불편하고 무겁기만한 이 녀석을 손에서 놓지 못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이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과 가장 비슷하다는 35mm 렌즈... 두 친구 덕에 좀 더 행복했던 걸음이었다. 


Nikon D700, AF 35mm f/2.0D, iPhone 5S


겨울 산행은 다른 계절에 비해 소위 '장비'가 필요해진다. '명필이 붓을 탓하랴'는 말도 있지만 겨울의 산에 대해서는 이 말이 어느 정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겨울 산행에 필수적인 장비들을 적어보자면 이것저것 많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장만(?) 해야할 품목에 배낭을 꼽아본다. 왜냐하면 겨울산에 오르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여러가지 장비나 의류들을 담을 수 있는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민고민 끝에 한 녀석을 들였다.


풍뎅이처럼 불룩 튀어나온 전면부가 인상적인 그레고리 Z40 2014년형이다. 그레고리 배낭이 이름값을 하는지는 이전에 사용해본 적이 없어 알 길은 없었고 고어텍스처럼 과대 평가된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무렵 우연히 찾은 매장에서 등에 메본 이후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거다! 라고 유레카를 외친 배낭이기도 하다.


뒷면은 이렇게 생겼다. 등산 배낭이 뭐 저리 복잡한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산행 중 땀이 등에 차서 흐르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류의 배낭을 사용해본 일이 있지만 심하게 땀이 나는 경우라면 이런 기능성 장치로도 사실 감당하기는 어렵다. Z40의 무게 배분은 아래에 보이는 허리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데 허리끈을 조인 상태에서 흔한 말로 어깨 부분에 달걀이 하나 들어갈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옆에서 바라보면 대략 이런 모양새인데 곡선으로 프레임이 들어가 있고 그것을 지지하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배낭의 수납력은 떨어지게 된다. 40리터급 배낭이면 1박 2일 정도의 산행에 무난해야 하는데 이 독특한 프레임 구조 덕분에 패킹을 신경 써서 하지 않으면 넣을 것 못 넣고 가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통기 시스템은 사용자마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부분이기도 하다.


상단 헤드 부분에는 안쪽과 바깥쪽으로 각각 수납 공간이 있다.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바깥쪽에 배치하면 되는데 전체적으로 내부 파티션은 없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물건을 패킹해야 하는 경우는 별도의 디팩이나 주머니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점은 다소 불만이긴 하지만 말이다. 재질은 일단 어느 정도 방수성을 갖고 있으며 내장된 레인커버가 있어서 악천후 대비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튼실한 허리벨트에 비해 늘 욕을 먹는 허리벨트 주머니는 신형 모델에서도 별반 개선된 것이 없어 보인다. 아이폰5S가 들어가고나면 거의 여유 공간은 없는 편인데 간단한 행동식이나 랜턴 정도는 수납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벨트가 배낭을 맸을 때 허리 좌우로 많이 치우치기 때문에 물건을 넣고 꺼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40리터급 배낭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임은 분명하다.


이전 모델과 다르게 신형 Z40은 하단부 개방이 되지 않고 경사가 진 형태로 되어 있다. 덕분에 배낭을 똑바로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014년형의 경우 백패킹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는 말도 있는데 사진에 보는 것처럼 하단에 깔판 같은 것을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런 의도로 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침낭을 묶기에는 조금 짧아 보이기는 한다.


전면의 풍뎅이 같은 부분은 그 형태 그대로 통짜의 수납 공간인데 가벼운 바람막이 정도는 수납이 가능하지만 우모복 같은 패딩류는 넣기에는 공간이 부족해보인다. 제조사의 설명으로는 옷을 넣는 곳이 맞기는 한데 역시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다. 도드라진 모습에 비해 애매한 수납공간이라 이곳을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이 좋을지는 고민이 좀 더 필요해보인다.


풍뎅이 부분을 들어올리면 나타나는 공간인데 또 하나의 수납공간이 등장한다. 그 공간은 제법 넓은데 역시 통짜 공간이라 애매하다. 아마도 내 패킹 습관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머니가 많은 것이 좋은데 그런 면에서는 Z40은 꽤나 불친절한 배낭인 것은 분명하다. 착용감에 반해서 들인 녀석이긴 한데 앞으로 산행을 하면서 적당한 사용법을 찾아야 할 것같다.


헤드를 들어올리면 이런 모양이다. 앞서 이야기한 내부 수납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중간쯤에 보이는 삼각형 모양쪽으로 수낭의 빨대(?)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수낭을 쓸 일은 없으니 내게는 불필요한 부분이다. 다른 배낭들도 그렇겠지만 Z40은 유난히 체결되는 고리들이 많은데 군대 시절 생각하면 소위 끈처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배낭의 메인(?)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상단을 조이는 방식인데 끈을 한쪽으로 당기면 배낭 입구가 개방되고 다른 쪽을 당기면 조여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좋은 것이 배낭의 크기를 어느 정도 사용자가 조절할 수 있다는 점때문이다. Z40도 이곳저곳에 배치된 끈들을 타이트하게 정리하면 제법 컴팩트한 크기로 작아진다.


위에서 보면 이런 모양인데 사진상으로는 잘 티가 나지 않지만 손을 넣어보면 프레임 구조때문에 수납 공간이 넉넉하다는 느낌보다는 좁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패킹을 효율적으로 하는 기술이 많이 부족한지라 결국은 디팩을 채워넣은 다음 나머지 공간을 활용해야 할 것 같은데 패킹을 잘 하는 분들은 넉넉한 공간일 수도 있겠다.


배낭을 거꾸로 돌리면 이렇게 보이는데 이전 버전과 달라진 것은 스틱 걸이가 고무줄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화면 상단에 좌우로 고리 2개가 보이는데 이 줄을 당긴 다음 스킥 하단부를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아무튼 Z40에서도 스틱을 걸고 풀기 위해서는 여전히 배낭을 등에서 벗어야 한다. 중간에 보이는 아래로 처진 고리 모양은 전면부를 개방할 수 있는 지퍼다.


지퍼를 열면 이렇게 배낭의 전면이 개방되는 형태인데 배낭을 위에서 부터 열지 않고 바로 내용물을 꺼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디팩 사용자라면 전면부가 개방되는 코끼리 디팩을 사용하는 것이 좀 더 편리하고 Z40의 경우는 미스테리월의 스몰-롱 디팩이 적당한 크기로 잘 어울린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지퍼에 연결된 천끈인데 끈을 지퍼에 고정시킨 부분이 바깥쪽으로 되어 있고 마무리가 약간 날카롭게 되어 있어 급하게 끈을 잡고 지퍼를 열 때 손이 다칠 수도 있는 점이다. 보통 지퍼를 열 때 좀 더 많은 힘이 들어가는 점을 생각한다면 방향을 반대로 고정시켰으면 어땠을까 싶은 부분인데 사용자가 주의를 하는 수밖에 없다.


글을 적다보니 처음 내가 Z40을 등에 메보고 느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데 아마도 직접 산행을 하고 난 이후의 감상이 아닌 방안에서 리뷰를 하듯 이것저것 비판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쓸만한 배낭인지는 꽤 많은 산행을 함께 한 다음에 비로소 알게될 것같다.

사진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사진을 찍는 것보다 바디나 렌즈에 더 신경을 썼던 기억이 있는데 등산에 한창 빠지고 나니 정작 산에 가는 것보다 산행 장비들에 정신이 팔리는 요즘이다. 취미라는 게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는 서툰 변명을 해 본다.



예전에 잠시 알고 지내던 아가씨가 자기는 10년마다 자기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더군요. 10년이라는 세월을 잘 살아준 자신에게 주는 기특함에 대한 선물이라고요. 그때 그말을 듣고 참 저도 그 아가씨가 기특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진도를 더 나아가볼까 했지만 워낙에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 연애나 그 이후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기에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요...)

아무튼 저도 2014년을 맞아 저에게 뭔가 하나 주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해는 참 개인적으로 버거웠던 그리고 어쩌면 제 인생에게 뚝 떼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힘든 해였고 온전히 저 혼자 버텨나가야했던 해였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뭐를 제게 줄까 생각하다가 우연치않게 이 녀석을 들이게됐습니다. 워낙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은지라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솔로로 지내면서 딱히 전화를 쓸 일이 없어 휴대폰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가 봅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반려동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금은 쓸쓸한 일입니다. 애정을 둘 대상이 사람인 것이 가장 좋은 것인데 그러질 못 하고 다른 '대상'에 의미를 주는 것이니까요. 사람에 의한 어떤 상처가 있건 그 상처는 특정 사람으로 인한 것이지 또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니기에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겠지요.

말은 그렇지만 저도 그것을 잘 극복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무래도 신뢰나 사랑 같은 내 감정을 온통 쏟아부은 경우에 후유증이 오래 가나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어떤 불편한 기억은 그 기억에만 한정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기억을 일반화해서 세상과 적대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겨울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고 주변의 일들도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그런 요즘입니다. 모두들 올 한 해 사람에게서 행복과 의미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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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올 한 해도 달력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세월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곱씹어보지 않아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또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매 해마다 겪는 일들이 새롭다.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일들이 내게 직접 일어난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 새로움들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는 것. 결국 우리네 삶이란 대개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서로 엮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어디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아직 혼자 잠드는 것이 걱정스러운 어머니때문이다. 올해는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슴 시리게 새겨주었다. 그리고 '삶', '생명'이라는 단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 주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짧은 삶 속에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라는 것. 부귀영화를 좇으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봄날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허상 자체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이제는 더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기 그지 없다.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의 하나인데 요즘은 돌아다니지를 않으니 예전 사진첩을 꺼내어 들춰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지금 다시 보면 그 때 찍었던 느낌과 생각과는 또 다른 느낌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사진에 반영되는 이미지는 셔터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감정과 당시의 마음상태가 고스란히 찍혀 나오지만 과거의 그 감상을 현재에 극복할 수 있다면 같은 사진으로 두 장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과 여행, 이 두 가지가 정말 축복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튼 정신없이 분주하던 한 해의 큰 일들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요즘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듯히 사람과 일의 인연도 전혀 생각지도 않게 마주치는 인연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되는 날. 다시 카메라를 들고 겨울을 걸어보고 싶다. 



오랜만에 다시 북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대로 두다가는 눈 덮인 겨울산을 더 보기 힘들 것 같아 없는 시간 쪼개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 다녀온 구간은 17구간과 18구간으로 드디어 경기도에서 다시 서울로 접어드는 나름 의미가 있는 걸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제법 맑고 하늘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던 데다가 며칠 새 눈이 제법 왔으니 설산을 보기에는 제격이다 싶었다. 물론 마음은 백운대에 가 있었지만 우선은 이 걸음을 마무리해야 한다.


17구간 다락원길은 지하철 1호선 망월사 역에서 시작한다. 이 구간은 이전 글에서 적은 지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형식이어서 따로 출발점이 있진 않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본격적인 둘레길 코스에 진입하는 동안 길가에 쌓인 눈은 정말 대단해서 인도는 거의 치워지지 않아 차도로 걸어야 했다. 멀리 도봉산 자락이 손짓해 부른다.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의 네 번째 산인 도봉산. 둘레길 완주가 마무리되면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다.


멍하니 산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에 시커먼 녀석이 있어 깜짝 놀랐다. 대충 3-4미터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은데 까마귀가 그렇게 큰 줄을 몰랐다. 아니면 이 녀석만 유달리 발육상태가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폼이 대단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는 흉조로 여겨지지만 길조로 여기는 나라도 있다. 아마도 이름이 좀 이상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머리도 좋다고 한다. 검은색에 대한 어딘가 모를 타부 의식이 아닐까 싶다.


이 구간은 사실 이제까지 걸어온 여러 구간들 중에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구간으로 꼽을만하다. 뭐랄까 특징이 없는 길이랄까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 구간을 걸으며 아쉬웠던 마음은 18구간인 도봉옛길에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아무든 이 근처에는 군 부대가 여럿 있는데 오늘은 사격일인지 총소리가 제벱 요란했다. 총소리라면 군 시절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다.


이제 제대로 된 산길에 접어든다. 아이젠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일단 그냥 가보기로 한다. 하지만 겨울산에는 무조건 아이젠과 등산스틱(마운틴 폴)을 이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눈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스틱은 미리 길을 짚어보는 용도로 유용하다. 아이젠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눈이나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번거로워도 채우고 출발하자. 가끔 보면 산을 잘 탄다는 호기에 혹은 몰라서 아이젠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젠 없이 눈길을 성큼성큼 달려간다고 해서 누가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진 않는다.


사방이 온통 눈이고 나무다.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풍경이다.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은 게 오늘은 좀 실수였다. 햇빛이 제법 강해서 눈에서 반사되는 빛이 상당히 강렬했다. 할 수 없이 실눈을 뜨고 걸어가곤 했는데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참 우스웠을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근방의 눈은 정말 많이 쌓여있었다. 사람 한 명정도 지나갈 정도의 길만 그나마 눈이 적고 그 주변은 발을 집어 넣으면 발목을 쉽게 넘을 정도였다.


요 며칠새 내린 눈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눈 쌓인 나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눈 무게가 상당한 까닭인데 나무는 그저 허리를 숙여 눈을 온몸으로 버텨낼 뿐 아무 불평도 없이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눈이 내린 이후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 길이어서 정말 원없이 눈을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대충 이 정도로 발이 푹 들어가는데 위에서 보니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발목 위로 훌쩍 올라온다. 어림짐작으로 20Cm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둘레길 시리즈를 쓰면서 내 몸이 출연하기는 처음이다. 전신 사진도 있긴 하지만 눈이 피로해질 분들이 상당수 되지 않을까 싶어 차마 그 사진을 올리지는 못 하겠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려둔 게 있긴 한데.. 아무튼...


대체로 무난한 산책로 정도의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다. 맨 아래에 트래킹 기록을 붙여 두었는데 17, 18구간을 참 천천히 걸었음에도 2시간 30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니 두 구간은 걷기 편한 길. 산책하기 좋은 길이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발 아래에서 들여오는 뽀드득 하는 눈 밟히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어딜 가나 눈이고 나무다. 볼 수 있는 색은 단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참 매력적이다. 도시로 돌아오면 정말 눈이 혼란스러울 정도의 많은 색들에 눈이 시달려야 하는데 눈 덮인 산을 걸으면 몇 개 안 되는 색밖에 볼 수 없고 그 색들에 푹 빠지게 되니 말이다. 산은 그렇게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우리 인간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길가로 조금 나오면 다락원 캠프장이 보인다. 참 좋은 지역에 캠프장이 있다 싶은데 누가 와서 캠핑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YMCA에 대해 생각나는 건 야구단 주제로 한 영화밖에 없기도 하고...다락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을 가던 이들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이 다락원길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경기도와 서울에 걸쳐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인데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만든다.


자, 이제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로 접어 든다. 북한산둘레길을 걸어보자고 생각한 이래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로 나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거리 상으로야 얼마 되지 않지만 이 길을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제법 오래 걸렸다. 오늘 17구간과 18구간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남은 구간은 단 세 구간뿐.. 19,20구간은 서울의 동쪽을 그리고 마지막 우이령길은 출발점을 어디로 잡건 경기도로 한 번 더 나가야 한다.


얼마 걷지 않았다 싶은데 17구간이 끝나고 18구간인 도봉옛길이다. 이 구간은 정말 괜찮다. 산을 오르는 듯한 재미도 있고 풍광도 근사하다. 그리고 이 구간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도봉산의 주등산로와 만날 수 있기도 하다. 평일임에도 이 구간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아마도 도봉산으로 향하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구간은 사찰이 여러 곳 있다. 자세히 들여다볼까 하다가 뭐랄까 그 화려함에 조금은 기가 죽어 글로 적지는 않기로 한다.


사람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 이 계단에 누군가 지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길이 나지는 않았을 것. 어디가 계단의 시작이고 끝인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 같은데 누군가 부지런히 걷고 또 걸으며 길이 만들어진다. 눈 덮인 산은 이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물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해 눈을 헤치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유를 부릴 틈은 없겠지만 말이다.


멀리 보이는 정상이 자운봉일까. 나는 아직도 산을 멀리서 보고 저기가 무슨 봉우리고 무슨 능선이고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 이름을 알고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기도 하다. 아마 저 봉우리들을 몇 번 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이름도 알게 되고 길도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어색해보이지만 그래도 꽤 멋진 풍경이다. 저 정상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먼 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정상 근처에 뭐가 뭍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진을 눌러보면(그래도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까마귀 한 마리다. 모니터에 뭐가 뭍은 거 아니니 혹 모니터 닦고 계신 분은 안 그러셔도 된다. 


있는 줌 없는 줌 다 당겨서 찍어본다. 120mm로 당긴 사진인데 똑딱이로는 확실히 아쉬운 면이 있다. 크롭을 해볼까 했더니 여지 없이 해상도가 무너져 버려 그냥 원본을 올린다. 그래도 이 정도로 보이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이럴 때는 니콘의 신병기인 D800이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뭐 그건 나중 일이다. 그래도 똑딱이가 이 정도로 사진을 잘 담아내는 게 오히려 기특하다.


자운봉 3.2Km.. 0.7Km 남았다 이러면 유혹에 끌려 한참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만 3Km가 넘어가면 빨리 포기할 수 있다. 산행으로 3Km면 도봉산의 난이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눈길을 감안하면 3시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싶다. 이미 시간이 꽤 되었고.. 또 어딜 갈 때 내가 늘 그렇듯이 먹을 것을 전혀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별 미련없이 둘레길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이 웅장한 건물(광각렌즈 효과일 뿐이다)은 도봉산 주등반로의 시점을 알리는 도봉분소다. 여기서부터 도봉산 등산을 시작하면 비교적 무난한 코스로 오를 수 있다. 내가 가장 가 보고 싶은 코스는 사패산에서 도봉 능선을 따라 북한산 백운대로 이어진는 코스인데 부실한 체력으로 산 3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싶어 일단 간만 보는 중이다.


평일임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도봉산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 사진을 잘 찍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분위기가 괜찮아 보여 한 장 남겨 본다. 강북5산 중에 도봉산과 북한산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산이 아닐까 싶다. 사패산이나 불암산, 수락산과 같은 이름은 어쩐지 조금은 낯설다. 아무튼 서울의 북쪽으로 이렇게 방대한 산자락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도봉산 등산객들과 갈라져 다시 둘레길 코스로 돌아오면 한적한 길이 이어진다. 이쪽 길은 휠체어를 탄 이들도 둘레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길이라고 하는데 아마 둘레길 전 구간에 걸쳐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구간에 이런 시설을 마련해두면 물론 좋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경치가 좋고 접근성도 괜찮은 이곳에 마련해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길을 걷고 또 걸어 하늘의 파란색과 땅의 하얀색이 만나는 길을 끝까지 오르면 18구간 도봉옛길도 어느새 종착점에 다다른다. 이제까지 걸어온 둘레길의 여러 코스 중에 단 한 구간을 고르라면 이곳 도봉옛길을 추천한다.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고(난이도도 '하'다). 주변에 둘러볼 수 있는 곳들도 많고 경치도 꽤나 좋은 편이다. 계절 가리지 않고 걷기에 참 좋은 길이 아닌가 싶다.


아무렇게나 묶여 있을만한 녀석이 아닌데 묶여 있다 싶어 한참 서로 바라본다. 저 녀석은 저기 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까. 나는 저 녀석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겠지만 그래서 저 녀석에게는 금방 잊히고 마는 그런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저 개는 단 한 마리로 기억되고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기억 속에 맴돈다.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만남은 스치는 순간 바로 잊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평생에 걸쳐 기억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기억에 오래 남거나 혹은 바로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얼굴들을 떠 올려 본다. 힘들여 기억해보려 하지 않아도 곧 떠오르는 얼굴들은 분명 내 삶에 좋은 면이건 그렇지 않은 면이건 큰 영향을 준 이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친 후 잊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참 후회스러운 일이었어..라고 기억하거나 기억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다행이었어..라고 서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오랜만에 눈 덮인 산에 이끌려 걸어본 둘레길이었다. 이제 정말 막바지구나 싶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3구간. 두 구간은 하루에 걸을 수 있고 우이령길은 예약제로 운영이 되기에 편한 날을 잡아 걸으면 된다. 총 21개 구간 71Km에 이르는 길. 어쩌면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맺음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여러 의미를 주는 것 같아 또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둘레길 완주가 끝나면 북쪽의 산들부터 하나둘 다녀볼 생각이다. 아마 첫 번째 대상은 사패산이 아닐까 싶은데 언제가 될 지는 역시 정해두지 않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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