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특징 중의 하나라면 뚜렷한 원색이 꽤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다닌 길만 그랬을 수도 있지만 거리를 걷는 내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렬한 색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고 주변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생각됐는데 어쩌면 신혼여행이라는 특수한 환경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주 보면 조금은 질리려나? 


파리 중심가는 아담하다. 인구가 많지도 않은 도시다. 복잡함보다는 인생이 곳곳에 널려있다. 낭만의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역사와 사람의 도시인 것은 분명했다. 그리 많은 나라들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프랑스는 내게 참 많은 생각을 던져 주었다. 다시 가 보고 싶은 나라 그리고 도시를 원없이 걷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집집마다 창가에 화분이 놓여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가장 달라진 것 중의 하나는 사물을 좀 더 자세히 그리고 낮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 아내는 길을 걸어도 허투루 걷지 않고 작은 꽃송이 하나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늘 무표정하게 초점을 두지 않고 걷는 나와는 참 많이 다른 사람이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하루하루 달라진다.


가만히 아내의 뒤에서 걸어본다. 우리가 걷는 순간순간이 둘만의 기억이 되는 시간. 참으로 먼 길을 돌고 돌아 만난 인연이 이제는 오롯이 한길을 바라보고 걷게 되었다.  아직은 부부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소중하다. 그리고 삶의 남아있는 시간들을 온전히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까. 울퉁불퉁한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내가 느낀 것은 그렇게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Nikon D700, AF 35mm f/2.0


'사진 이야기 > 여행 혹은 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Swiss #1  (1) 2017.01.30
@Paris #1  (4) 2016.06.02
초가을 정동진 그리고 바다  (17) 2014.09.22
두륜산 대흥사, 2014년 여름  (12) 2014.08.31
팽목항, 100일 그리고 진도항  (9) 2014.08.02


봄이 오고 벚꽃이 흩날릴 무렵이 되면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작품이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Cm'다. 처음에는 무슨 제목이 이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작품을 보고 또 보게 되면 그 의미가 좀 더 마음속에 새겨진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인 초속 5Cm..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일 수도 있다. 정확히 꽃잎이 날리는 속도를 잰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찰라의 속도는 사랑하는 두 연인에게 있어서는 둘만의 약속. 그리고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영원이란 동시에 순간인 것.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순간은 영원이고 영원은 곧 순간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설레고 또 애틋하다. 이 이상의 다른 표현이 있을까 모르겠다. 사랑을 하면서 겪는 행복한 시간이 많았을까 애틋한 시간이 많았을까 도돌이켜 보면 나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또 둘이 한곳을 향해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평범한 우리네 인간의 삶에서 정말 큰 힘이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삶 자체의 목표가 되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혼자서 세상과 맞서는 일은 역시나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곁에서 손을 꼭 잡아 힘이 되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삶의 길은 물론 상대의 삶의 길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바탕이 된다. 사랑에 있어서는 힘겨움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 고통도 함께 해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으리라...


서로를 서로가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은 진실이 되고 비록 다른 길을 걷게 되어 다시는 마주칠 수 없더라도 영원이 된다. 아마도 세상이 끝나는 날 가장 사랑했던 이를 떠올려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사람은 정말 짧은 바람처럼 스쳐갔던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에 있어 함께 한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까닭이다. 

그 사람이 단지 그 사람이기에 내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그 사람 자체가 전부인 것.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것을 실제로 지키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 그 편견에 물든 혹은 물들어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후에야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사랑이 변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일까? 애초에 사랑 자체는 변하지 않는데 사람이 변할 뿐일까?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할 수 없이 헤어진다는 말이 정말 맞는 이야기일까?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 감정 자체는 변하지 않는데 자신이 변할 뿐이다. 그리고 변해버린 자신이 어색하고 참을 수 없기에 사랑이 변한다는 말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에요"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해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외로움에 혹은 허전함에 누군가 다른 이를 만나게 되고 그것을 또 사랑이라 부르고 그 관계에 열중해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미 사라진 어느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내가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와 과거의 누군가가 여전히 겹쳐 보이지만 그 겹침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정작 어느 기억이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었는지조차 망각해버리게 된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겹침 속의 망각이 반복되는 셈이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익숙해져간다. 내가 그렇듯 그녀가 그렇듯...

"마음은 1Cm 정도 밖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는 대사는 그렇게 이루어진 공허한 사랑이 결국 각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서로에 대한 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오랜 물리적인 시간을 함께 보냈을지라도 마음의 거리는 벚꽃이 땅에 떨어지는 그 짧은 거리만큼도 다가서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공허한 사랑조차 사랑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쓸쓸할까?


이 작품의 부제 '그들의 거리에 관한 짧은 연작'은 

벚꽃이 비처럼 내리는 아직은 이른 봄날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가

눈이 비처럼 내리는 어느 겨울날 내 마음 속으로 잦아들었다.


기억의 순서는 시간의 순서가 아닌 추억이 깊이에 따라 정해진다.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누군가와의 추억..그것이 가장 소중했던 그리고 평생 가장 소중한 순수한 사랑이다.



어제, 꿈을 꿨다

아주 옛날 꿈…

그 꿈 속에서는우리는 아직 13살로…

그곳은 온통 눈으로뒤덮인 넓은 정원으로

인가의 불빛은한참 멀리 보일 뿐으로…

뒤 돌아본 깊게 쌓인 눈에는우리가 걸어온 발자국 밖에 없었다


- 그렇게

- 언젠가 다시


함께 벚꽃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도, 그도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속 5Cm, 사랑의 거리에 관한 짧은 기억"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듯한 옷가지들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과 그 위로 또 걸려 있는 간판들과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을 듯한 아직은 앙상한 겨울의 색이 남아 있는 나무들

거리의 사소함들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조화를 이루려는 듯 펼쳐지고 있었다.

길은 멀리서 나를 오라 하는데 아직은 봄을 맞기 어색한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행여나 봄의 향기라도 맡아볼까 까치발을 하고 코를 내밀어 본다.

D700, AF Nikkor 35mm f2D 

'사진 이야기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 그리고 한가함  (0) 2012.03.24
세종대왕 그리고 광화문  (0) 2012.03.22
사랑..해 본 적 있어?  (4) 2012.02.09
어느 골목길에서..  (0) 2011.09.12
8월, 고양이, 아르바이트  (0) 2011.08.04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가 있었던 장소라면 역시 잠실이다. 처음 시작한 연애의 장소였고 그 아이의 집이 있던 곳이었는데 데이트를 할 때는 내가 잠실에 가 그 아이를 만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공항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잠실 롯데백화점에 내리면 언제나 환한 얼굴의 그 아이를 볼 수 있었고 벌써 헤어진 지 수 년이 지났음에도 잠실과 신천 주변은 내게 각별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직장이 될 회사가 있는 곳도 잠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올림픽공원 앞. 며칠 차를 몰고 그 아이의 집 앞을 바로 지나가면서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한 그 주변을 돌아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긴다. 인연이란 참 맺기도 어렵지만 끊기 또한 어려운 것인가보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간다는 것만 해도 참 큰 인연인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앞으로 많은 시간을 또 난 이 거리를 걸을 것이고 가끔은 그 아이와 찾아갔던 상점이나 같이 걷던 거리를 나 혼자 찾아가볼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 못 잊는다 하던가..적어도 내 경우라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다.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소식에...  (2) 2009.02.16
ISIC 정보 노출 주의하세요  (0) 2009.02.10
이런 아르바이트는 어떠세요?  (6) 2009.01.24
디지털 시대의 인간관계  (2) 2009.01.23
좋은 상사란?  (4) 2009.01.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