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북한산둘레길을 걷고 있을 때 두 번정도 산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북한산이고 또 한 번은 사패산이다. 둘중 사패산을 먼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 겨울 둘레길을 걸을 때 먼 발치에서 바라본 사패산의 느낌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사패산을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정상에 오르는 길도 몇 가지나 된다. 등산 초보인 내 입장에서는 그래도 수월한 길이 어디일까 찾아보다가 의정부 회룡역에서 출발하는 코스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사패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당시 6째 딸인 정휘옹주가 시집을 갈 때 하사한 산이라 하여 賜牌山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이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은 갓바위산, 삿갓산이었다고 한다. 북한산도 삼각산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이 있는 것처럼 사패산도 이전의 이름을 찾아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으면 '회룡사'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날 수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된다. 길을 조금 걷다보니 익숙한 표지판이 보인다. 1년여에 걸쳐 걸었던 북한산둘레길. 한 해를 정신적으로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었던 그 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둘레길은 틈나는 대로 다시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사진이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클릭하면 약간 커진다) 오늘 가게될 길은 회룡사를 지나 회룡사거리, 범골삼거리를 지나 사패산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에 오를 때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나 홀로 걷는 산행이라면 더더욱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을 필요가 있다. 물론 빠르게 속전속결식으로 산에 오르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저 거북이 스타일이다.


회룡탐방지원센터인데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아직 영업개시(?) 전이다.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북한산국립공원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몇 장 안 되지만 여기까지는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작은 화면으로 볼 때는 그래도 괜찮아보이더니 모니터로 옮겨오니 '영 아니올시다'라는 느낌이다. 뭔가 인화된 사진을 물에 담가둔 느낌같기도 하고... 아이폰으로도 사진을 잘 찍는 분들도 있던데.. 내 둔한 감각을 탓해본다.


어디 가서 길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 편인데 산에만 오면 어디가 어딘지 아니 어느 봉우리가 무슨 산이고 지금 내가 있는 위치가 산의 어디쯤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산행 경험이 적어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다. 아무튼 저기 뒤쪽으로 보이는 머리가 벗겨진 봉우리가 사패산 정상인가라고 추측만 해본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북한산둘레길 중 하나인 보루길이다. 보루길로 올라가면 사패산 보루들을 만날 수 있다.(이전 글 참조) 그렇다는 것은 보루길을 통해서도 사패산에 오를 수 있다는 셈인데 이전 글을 뒤적여보니 포대능선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능선따라 죽 이어진 모양이다. 사실 사패산도 북한산 자락이니 어디로든 길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길을 조금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사패공방'. 주인장은 안 계신지 조용했고 벽 쯤에 붙어 있는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누군가를 기다려본 지도 제법 오래됐다.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가. 그래도 역시 누군가 만날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조금 더 행복하다. 머지 않아 나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인다'라는 말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긴다.


이곳이 회룡골계곡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지도앱이라도 켜서 확인을 했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산행은 그저 산과 내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다른 요소들을 끼워넣는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산을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아날로그인데 굳이 거기에 인간 세계의 날카로움을 덧입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사패산 등산코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도다. 내가 가는 길은 가운데에 있는 회룡사를 지나 위로 올라가 사패능선에서 우회전하는 코스다. 등산 정보를 찾아보니 4코스라고 한다. 사패능선 그러니까 회룡사거리에서 좌회전으로 하게 되면 포대능선을 지나 도봉산 자운봉으로 갈 수 있다. 언젠가 산행이 조금 더 익숙해지면 가 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오늘은 사패산만 바라보고 올라가보자.


조금 더 올라가면 회룡사를 만날 수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막 지난 터라 아직 연등이 곳곳에 매달려 있다. 큰 행사가 끝나서인지 인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혼자 돌아다니자니 어쩐지 어색해져서 사진만 살짝 찍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니 산에 있는 절에서는 점심 때 절밥을 준다는데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하산할 때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이때까지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보이는 좁은 길이 등산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산 정상만 목표로 하고 길을 나서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태백산, 인왕산, 청계산 정도가 아닐까? 물론 객기로 올랐었던 설악 대청봉도 있었지만 그건 도무지 산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이전에 올린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튼 산행은 둘레길 걷기보다는 준비할 것들이 많다. 오늘은 스틱을 두고 왔는데 하산길에 생각하면 가져오는 것이 나았다.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돌탑(?)이다. 산을 오르는 이들의 작은 소원들을 모아놓은 돌무더기. 크고 높은 것들도 많지만 이렇게 앙증맞게 있는 것이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돌 하나를 주워 올려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누군가 올려 놓은 돌 위에 내 소원까지 올리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서다. 그냥 저 돌을 올린 분들의 소원만 이루어져도 충분하다.


산을 조금이라도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산에서 만나는 이정표의 거리는 진짜 별 의미가 없다. 단순히 사패능선까지 800미터다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등산길은 꾸준한 오르막이고 사패산의 경우는 일직선에 가깝지만 어느 산들은 구불구불한 길들이 제법 많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 거리만 생각해서 등산이나 하산 혹은 휴식 계획을 세우면 낭패를 보기 쉬우니 페이스 조절을 잘 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저런 표지판이 보이면 대충 곱하기 2를 해버린다. 사패능선까지 1.6km 남았다고 보고 간다는 말이다.


갈림길에서 내가 길을 잘못 든 지점이다. 양쪽 길 모두가 등산로처럼 되어 있어서 어느 길을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쪽 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길의 끝은 막다른 곳이다. 그럼에도 들머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표지판이 하나 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결과적으로는 없는 것이 나았다. 왜냐하면 이길의 끝에서 만나는 곳이 꽤나 멋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골짜기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 비슷한 것이 있었다. 약수터라고 하기에는 물이 고여있지 않으니 아닌 것 같지만 바가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물을 먹으라는 소리니 약수터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물은 제법 시원하다. 요즘에는 산에 흐르는 물도 안심하고 마시기 어렵다지만 산행 중간에 만나는 물마저 외면해야 한다면 너무 인간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다만 바가지에 봄벌레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파이프를 들어 올려 한 모금 산의 느낌을 맛본다.


내가 좋아하는 산은 겨울산이지만 봄의 산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지난 겨울의 못 다 지워진 흔적들과 다가오는 여름을 미리 알리는 징조들이 섞인 느낌인데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봄의 산이 주는 매력이다. 요즘은 봄이 워낙 짧아 봄의 산을 느끼려면 4월말에서 5월초 정도가 적당하다. 그전은 겨울의 느낌이 강하고 그 후는 여름의 느낌이 강한 까닭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만 오늘도 입하가 지났으니 이미 여름인 셈이지만...


이쪽 계곡에는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아마도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면 이 계곡에도 물이 흐를 것 같은데 다른 계절을 겪어보질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다. 여름에 다시 한 번 와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사패산은 북한산국립공원 안에서도 가장 자연림이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확실히 나무들이 어느 곳보다 울창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곳곳에 짙에 깔린 이끼들을 보면 이 산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 수 있다.


산에 오를 때는 가능하면 작은 것들을 좀 더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정상에 오르는 것은 그런 걸음의 결과일 뿐이지 끝까지 오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무작정 정상에만 오를 생각으로 급하게 산을 오르다보면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그냥 지나쳐버리게 된다. 산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정상에만 있지 않다. 그 많은 것들을 버리고 끝에 있는 하나의 이야기만 들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은 아닐까?


경사가 급해지는 것을 보니 사패능선에 거의 다 와가는 모양이다. 둘레길을 걸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나 별 다른 식량(?)준비를 해가지 않는 탓에 여기쯤 오니 제법 숨이 차다.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이야기는 잘 하면서 정작 나는 제대로 준비를 안 한 셈이다. 혼자 하는 산행이다보니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번거롭다고 스스로 변명도 해보지만 그대로 짊어지고 돌아가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먹거리는 챙겨와야 한다.


사패능선 그러니까 회룡사거리인데 이곳에서 만나는 표지판은 자운봉과 사패산이 정반대의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거리가 만만해보이지만 위에서 적은 것처럼 저 숫자에 곱하기 2를 해보면 어느 곳도 만만하지가 않다. 표지판을 가만히 보니 자운봉은 '봉'이고 사패산은 '산'이다. 이건 산의 규모에서 오는 차이인데 사패산은 여러 봉우리들이 없는 반면에 도봉산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등 여러 봉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봉산의 주봉은 자운봉이다.


능선길은 거의 평지도 되어 있어 걷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가림막이 없다보니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기 때문에 제법 쌀쌀한 느낌이다. 아마 겨울에 이곳에 왔다면 이쯤에서 바람막이 정도는 입어야 체온유지가 되지 싶다. 물론 여름에도 올라오는 동안 땀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능선에 오르면 순간적으로 춥게 느껴질 수 있으니 바람막이는 사시사철 배낭 안 구석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다.


사패산은 흔히 말하는 꼴딱고개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 같지만 사패능선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그리고 이 계단과 이어 등장하는 바위들에서는 체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좋다. 이 계단은 갯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촘촘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기 보다는 한칸씩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정상 부근의 바위인데 여기는 경사에 비해 어렵지는 않지만 일방통행 코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늘 신고간 신발은 바위적응형 등산화는 아니어서 약간 미끄러웠는데 바위 위에 흙 등이 있는 경우는 특히 조심하자. 바위에 척척 달라붙는 등산화가 아니라면(물론 붙어도 마찬가지지만) 무리는 금물인 지점이다.


정상에 오르면 평평한 모습의 작은 운동장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계절마다 그리고 날마다 다르겠지만 오늘은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었다. 정상의 경우는 바람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는데 사패산 정상은 그냥 통바위들이 듬성듬성 연결된 형태이고 조금 내려가면 경치가 더 잘보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아래 쪽 바위로 향하게 되는데 바위 끝이 아무 것도 없이 바로 절벽으로 이어지므로 조심하도록 하자.


바위 끝 쯤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모습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겠다고 앞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자. 사실 조금 더 간다고 해서 뭐가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정상에서 장비를 다시 점검하고 하산을 준비한다. 원래는 올라온 길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이전 둘레길의 기억이 떠올라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본다. 하산길은 거의 사진이 없는데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내 습관이라면 습관인데 등산보다 하산길이 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산의 방향은 원각사 쪽으로 정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상당히 빠른 시간에 하산이 가능한데 문제는 교통편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하나고 길이 약간 험하다는 게 또 하나의 문제다. 보통 폭포가 있는 루트는 길이 험하다고 하는데 예전에 북한산에서 한 번 제대로 고생을 해본지라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일단 내려가보기로 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아이폰으로 촬영.


세월이 계단을 만들었다. 이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걸음을 지탱하며 살아왔을까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 그 걸음에도 이 나무는 여전히 이곳에 버티고 서 있다. 이 길을 지나려면 이 나무를 밟지 않으면 안 되고 그 고통 속에서 나무는 점점 더 단단해졌으리라. 사람도 역경을 이겨내면 강하진다고 말을 하는데 요즘은 그말이 그렇게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역경 안에서 오히려 가라앉는 모습을 더 많이 봐서일까.. 결국 모든 것은 사람 나름이다.


원각사 길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다. 내가 사패산에 올라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곳. 산너미길로 오는 길에 먼발치에서 바라본 사패산이 그리도 정겨워 보여서 이길을 걷던 날 사패산에 오르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패산의 정상을 다시 바라봤다. 지난 겨울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다고 산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어도 여전히 산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기다림이란 만남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그리고 산은 내가 그 초입에서 산을 바라볼 때 그 모습 그대로 내가 그를 떠나는 순간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Nikon D700, AF 35mm f/2.0D & iPhone 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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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22미터인 사패산은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 그러니까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의 하나로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인용한 것은 다른 산을 올라본 적이 없어서 내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인데.. 나중에 내 기준에서 느낌은 다시 적어보겠다. 아무튼 오늘 오른 코스는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출발해 회룡사를 거쳐 사패능선을 통해 정상에 오른 다음 원각사 방향으로 하산해 송추에서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대략 전체 이동 경로는 위 사진과 같은데 평소 걸음은 빠른 편이지만 산행은 최대한 느릿느릿 가는 편이라 전체 소요시간은 3시간 20분, 이동거리는 8.2km였다. 하산 후 교통편은 하산한 지점에서 바로 건널목을 건넌 다음 34번이나 360번을 타면 구파발역으로 갈 수 있으니 그곳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된다.



북한산둘레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작년 5월 8일이고 어제 그러니까 2013년 5월 8일에 마지막 구간인 21구간 우이령길을 걷었다. 뭔가 지고 있던 짐을 덜어놓은 기분이 들면서도 아쉬운 마음이다. 북한산둘레길은 총 길이가 71.8km에 달하고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길이 나 있어서 구간마다 계절마다 독특한 느낌을 주는 길이다. 서울이나 경기에 사는 이들에게는 강북5산(불수사도북)이 있고 이 둘레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큰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둘레길 홈페이지에서 캡쳐한 전체 구간이다. 처음 이 길을 완주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막상 걷기를 시작하고 나니 딱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둘레길을 걷는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무뚝뚝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볍게 목례를 던져 주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들... 결국 길이라는 것은 사람과 이어지는 그런 것이 아닐까 돌아온 길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든다.


21구간 우이령길은 사전예약구간이다. 하지만 주말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예약이 가능하다. 내가 택한 코스는 교현에서 출발해서 우이동으로 들어오는 코스인데 이길을 가려면 서울에서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 내려 740번이나 34번을 타고 석굴암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우이에서 출발하는 것도 괜찮긴 한데 만약 식사를 할 생각이 있다면 우이동 쪽이 먹거리가 조금 더 많기 때문에 교현에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 우이로 나올 경우는 버스를 타고 수유역이나 쌍문역으로 가면 된다. 

미리 적지만 21구간 우이령길은 별 다른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길도 출발한 선에서부터 거의 일직선으로 나있다고 보면 된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많지 않고 계단은 아예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갈 수 있다. 구간 안쪽에 군부대와 경찰부대가 있어서 가끔 차들도 다닌다. 애초에 둘레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가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오랜만에 보는 군부대 앞 표지. 무려 39개월을 복무했지만 저걸 지키는 부대는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칙으로 지키는 이유는 원칙이 있어야 예외나 융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위 FM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인데 어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닥쳤을 때 뭔가 기준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된다. 쓰지도 않는 것을 왜 매일 연습하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이들이 하는 쉬운 핑계일뿐이다.


길을 이렇게 거의 일직선으로 곧게 나 있고 갈림길도 없다시피해 헷갈릴 일도 없다. 그저 산의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걸으면 된다. 다만 햇빛을 피할 곳이 거의 없는데 여름에 이 길을 걸을 때는 준비를 잘 해야할 것 같다. 햇빛이 그대로 내리 쬐기 때문에 길의 난이도가 낮음에도 쉬이 지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후 이 길을 가는 분이라면 선크림, 선글라스, 팔토시, 모자 정도는 꼭 준비하시길...


계절의 탓인지 날파리들이 심심치 않게 얼굴로 달려 든다. 전에 무슨 TV방송에서 날파리들이 사람 눈에 알을 낳는다는 끔찍한 소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눈 앞으로 달려드는 것은 신경이 제법 쓰인다. 길을 들어설 때부터 길을 마무리 할 때까지 날파리와의 전쟁이다. 이 날파리들은 참 묘하게도 사람의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어떻게들 알고 그리 달려드는지...


길을 조금 더 가면 멀리 오봉이 보인다. 원님의 딸을 맞아들이기 위해 내기로 던진 돌이 올라가 자리 잡았다는 전설이 함께 한 오봉. 다섯 개의 봉우리인데 나중에 사진을 더 올리겠지만 4개까지는 그럴 듯 한데 나머지 하나는 조금 애매하다. 사봉이라고 하기 뭐해서 오봉이라 한 것인지 아니면 원해 다섯 개의 돌이 있었는데 한 개가 굴러 내려간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문든 편지를 써 본 적이 언제인가 돌이켜본다. 흔한 연애편지가 아닌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던가.. 아마도 남자들에게는 군 시절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뭔가 절실한 환경에서는 가족에게 글을 쓴다. 나는 지금도 군 시절의 편지들을 가지고 있는데 가족들이 보낸 편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신병교육대 교관 시절 훈련병들이 보낸 편지 등등이 남아 있다. 지금 그 편지들을 읽어보면 참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에는 가장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오고간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는 중에 간간히 총소리가 들려 사격장이 있구나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정도 가니 군인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유격훈련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장교 교육 시절 받았던 유격은 정말이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고통 그 자체였는데... 늘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은 과장하는 습성이 있어서 요즘 군대 편해졌다느니 우리 때는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바로 지금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보다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에게 "그것도 못 이겨내냐"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전체적인 우이령길의 안내도다. 앞서도 적었지만 길을 걷는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가벼운 산책코스로 이용하기에도 적당하지만 계절에 따라 준비를 해 가야 할 것들은 잘 챙겨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구간은 다른 구간처럼 중간에 걷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 빠져 나갈 샛길이 존재하지 않으니 볼일은 미리미리 다 보고 걷도록 하자.


이제 이 초소를 지나면 길이 좁아진다.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전체적으로 21구간은 구간 자체를 걷는 시간보다 출발점까지 가는 시간 종착점에서 교통편을 이용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여기쯤 왔으면 일단 좀 쉬어 가는 것도 괜찮다. 요즘 방울토마토를 종종 먹는데 평생 살면서 올해 처음으로 제대로 먹게된 녀석이다. 의자에 앉아 한개 두개 입에 넣어본다. 톡 터지는 맛이 산행에는 제격이다. 


표지판대로 맨발로 걸어도 괜찮다 싶다. 등산화를 신고벗는 것에 별다른 귀찮음을 느끼지 않는다면 여기서부터는 신발을 벗고 걸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실제로 몇몇 분들은 맨발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행여 발에 뭐라도 박히지 않을까라는 소심함에 나는 끝내 신발을 벗지는 못했다. 상을 차려줘도 수저를 들지 못하니 원...아무튼 맨발로 길을 걷는 것은 권할만한 일이다. 올 여름 어느 바닷가 백사장이라도 걸어보면 어떨까.


앞서 사진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 뭔가 풍경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내내 이런 모양이다. 지루하게도 생각될 수 있는데 그럴 때는 걸음을 느리게 걸으며 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지루함을 물리치는 좋은 방법이다. 겨우내 이곳에는 이런 푸름은 전혀 없었을 것이고 계절이 바뀌어 순식간에 길 전체가 생명으로 가득하게 된 것만 해도 신비로운 일이니 말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이는 오봉이다. 4개까지는 '아..'하고 이해가 가는데 다섯번 째는 긴가민가하다. 아마도 바위 위에 또 다른 바위가 도드라져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120mm까지 당겨보아도 내 눈에는 여전히 '사봉'이다. 바위가 한 개 더 올라가 있어야 오봉이라는 이름에 어울릴거라고 내가 애초에 생각을 고정해둔 탓이겠지만 말이다.


전방에 가면 도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대전차장애물. 이곳에 이런 것이 있으니 좀 뜬금없다 싶기도 하지만 교현에서 우이까지 산을 관통해 갈 수 있는 길이 공식적으로는 이길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차의 폭이 이렇게 좁은 경우는 좀처럼 많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그저 과거의 역사의 흔적의 하나 정도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이곳이 소귀고개인데 우이령의 우리말 표현이다. 우이령이라고 하면 대체 무슨 뜻인가 생각을 해야 하지만(물론 내 경우다.) 소귀라고 하니 단박에 이해가 간다. 차라리 소귀고개라는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게 낫지 않겠나 싶은데 그러지 못 하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다는 짐작은 간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이 우이동에서 소귀동으로 바뀌면 그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겠나.. 아파트 이름을 바꾸었더니 집값이 올라갔다고 반기는 것이 우리네들의 생각인데 소귀동이라면...


북한산둘레길 21구간 우이령길은 이렇게 끝이 난다. 우이동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관리하는 사무소를 지나 버스를 타는 지점까지 걷는 거리가 제법 멀다. 좌우로 음식점들이 죽 늘어서 있고 포장된 길을 죽 걷다보면 지금 한창 공사 중인 큰길로 나오게 된다. 

우이령길은 실제 거리는 짧지 않음에도 '아, 벌써 길이 끝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금방 걸을 수 있다. 석굴암 입구에서 우이동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가 약  7km정도 되는데 아주 단순하게 성인 남성이 1시간에 4km를 걷는다는 기준을 적용하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사이면 얼추 전체 거리를 걸을 수 있다. 마지막 구간이고 예약제인탓에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이래저래 심심한 길이지만 이제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떠올리면서 걷게 되면 애틋한 마음마저 드는 것이 21구간 우이령길의 매력이다.

이제 길 하나를 마무리했으니 다음에는 어디를 걸을까 행복한 고민이다. 미뤄두었던 북한산 오르기를 해볼까 전부터 가 보고 싶던 사패산을 가볼까 생각이 많다. 어찌 되었건 그래도 산이 그리고 길이 좋은 것은 언제고 다시 돌아와 그곳에 설 수 있다는 점때문이다. 인간의 유한한 삶에 비하면 산이나 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길이와 깊이는 거의 무한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Panasonic LX-7

 

오랜만에 다시 북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대로 두다가는 눈 덮인 겨울산을 더 보기 힘들 것 같아 없는 시간 쪼개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 다녀온 구간은 17구간과 18구간으로 드디어 경기도에서 다시 서울로 접어드는 나름 의미가 있는 걸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제법 맑고 하늘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던 데다가 며칠 새 눈이 제법 왔으니 설산을 보기에는 제격이다 싶었다. 물론 마음은 백운대에 가 있었지만 우선은 이 걸음을 마무리해야 한다.


17구간 다락원길은 지하철 1호선 망월사 역에서 시작한다. 이 구간은 이전 글에서 적은 지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형식이어서 따로 출발점이 있진 않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본격적인 둘레길 코스에 진입하는 동안 길가에 쌓인 눈은 정말 대단해서 인도는 거의 치워지지 않아 차도로 걸어야 했다. 멀리 도봉산 자락이 손짓해 부른다.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의 네 번째 산인 도봉산. 둘레길 완주가 마무리되면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다.


멍하니 산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에 시커먼 녀석이 있어 깜짝 놀랐다. 대충 3-4미터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은데 까마귀가 그렇게 큰 줄을 몰랐다. 아니면 이 녀석만 유달리 발육상태가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폼이 대단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는 흉조로 여겨지지만 길조로 여기는 나라도 있다. 아마도 이름이 좀 이상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머리도 좋다고 한다. 검은색에 대한 어딘가 모를 타부 의식이 아닐까 싶다.


이 구간은 사실 이제까지 걸어온 여러 구간들 중에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구간으로 꼽을만하다. 뭐랄까 특징이 없는 길이랄까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 구간을 걸으며 아쉬웠던 마음은 18구간인 도봉옛길에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아무든 이 근처에는 군 부대가 여럿 있는데 오늘은 사격일인지 총소리가 제벱 요란했다. 총소리라면 군 시절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다.


이제 제대로 된 산길에 접어든다. 아이젠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일단 그냥 가보기로 한다. 하지만 겨울산에는 무조건 아이젠과 등산스틱(마운틴 폴)을 이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눈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스틱은 미리 길을 짚어보는 용도로 유용하다. 아이젠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눈이나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번거로워도 채우고 출발하자. 가끔 보면 산을 잘 탄다는 호기에 혹은 몰라서 아이젠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젠 없이 눈길을 성큼성큼 달려간다고 해서 누가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진 않는다.


사방이 온통 눈이고 나무다.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풍경이다.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은 게 오늘은 좀 실수였다. 햇빛이 제법 강해서 눈에서 반사되는 빛이 상당히 강렬했다. 할 수 없이 실눈을 뜨고 걸어가곤 했는데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참 우스웠을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근방의 눈은 정말 많이 쌓여있었다. 사람 한 명정도 지나갈 정도의 길만 그나마 눈이 적고 그 주변은 발을 집어 넣으면 발목을 쉽게 넘을 정도였다.


요 며칠새 내린 눈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눈 쌓인 나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눈 무게가 상당한 까닭인데 나무는 그저 허리를 숙여 눈을 온몸으로 버텨낼 뿐 아무 불평도 없이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눈이 내린 이후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 길이어서 정말 원없이 눈을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대충 이 정도로 발이 푹 들어가는데 위에서 보니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발목 위로 훌쩍 올라온다. 어림짐작으로 20Cm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둘레길 시리즈를 쓰면서 내 몸이 출연하기는 처음이다. 전신 사진도 있긴 하지만 눈이 피로해질 분들이 상당수 되지 않을까 싶어 차마 그 사진을 올리지는 못 하겠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려둔 게 있긴 한데.. 아무튼...


대체로 무난한 산책로 정도의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다. 맨 아래에 트래킹 기록을 붙여 두었는데 17, 18구간을 참 천천히 걸었음에도 2시간 30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니 두 구간은 걷기 편한 길. 산책하기 좋은 길이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발 아래에서 들여오는 뽀드득 하는 눈 밟히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어딜 가나 눈이고 나무다. 볼 수 있는 색은 단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참 매력적이다. 도시로 돌아오면 정말 눈이 혼란스러울 정도의 많은 색들에 눈이 시달려야 하는데 눈 덮인 산을 걸으면 몇 개 안 되는 색밖에 볼 수 없고 그 색들에 푹 빠지게 되니 말이다. 산은 그렇게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우리 인간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길가로 조금 나오면 다락원 캠프장이 보인다. 참 좋은 지역에 캠프장이 있다 싶은데 누가 와서 캠핑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YMCA에 대해 생각나는 건 야구단 주제로 한 영화밖에 없기도 하고...다락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을 가던 이들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이 다락원길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경기도와 서울에 걸쳐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인데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만든다.


자, 이제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로 접어 든다. 북한산둘레길을 걸어보자고 생각한 이래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로 나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거리 상으로야 얼마 되지 않지만 이 길을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제법 오래 걸렸다. 오늘 17구간과 18구간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남은 구간은 단 세 구간뿐.. 19,20구간은 서울의 동쪽을 그리고 마지막 우이령길은 출발점을 어디로 잡건 경기도로 한 번 더 나가야 한다.


얼마 걷지 않았다 싶은데 17구간이 끝나고 18구간인 도봉옛길이다. 이 구간은 정말 괜찮다. 산을 오르는 듯한 재미도 있고 풍광도 근사하다. 그리고 이 구간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도봉산의 주등산로와 만날 수 있기도 하다. 평일임에도 이 구간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아마도 도봉산으로 향하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구간은 사찰이 여러 곳 있다. 자세히 들여다볼까 하다가 뭐랄까 그 화려함에 조금은 기가 죽어 글로 적지는 않기로 한다.


사람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 이 계단에 누군가 지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길이 나지는 않았을 것. 어디가 계단의 시작이고 끝인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 같은데 누군가 부지런히 걷고 또 걸으며 길이 만들어진다. 눈 덮인 산은 이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물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해 눈을 헤치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유를 부릴 틈은 없겠지만 말이다.


멀리 보이는 정상이 자운봉일까. 나는 아직도 산을 멀리서 보고 저기가 무슨 봉우리고 무슨 능선이고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 이름을 알고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기도 하다. 아마 저 봉우리들을 몇 번 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이름도 알게 되고 길도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어색해보이지만 그래도 꽤 멋진 풍경이다. 저 정상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먼 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정상 근처에 뭐가 뭍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진을 눌러보면(그래도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까마귀 한 마리다. 모니터에 뭐가 뭍은 거 아니니 혹 모니터 닦고 계신 분은 안 그러셔도 된다. 


있는 줌 없는 줌 다 당겨서 찍어본다. 120mm로 당긴 사진인데 똑딱이로는 확실히 아쉬운 면이 있다. 크롭을 해볼까 했더니 여지 없이 해상도가 무너져 버려 그냥 원본을 올린다. 그래도 이 정도로 보이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이럴 때는 니콘의 신병기인 D800이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뭐 그건 나중 일이다. 그래도 똑딱이가 이 정도로 사진을 잘 담아내는 게 오히려 기특하다.


자운봉 3.2Km.. 0.7Km 남았다 이러면 유혹에 끌려 한참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만 3Km가 넘어가면 빨리 포기할 수 있다. 산행으로 3Km면 도봉산의 난이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눈길을 감안하면 3시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싶다. 이미 시간이 꽤 되었고.. 또 어딜 갈 때 내가 늘 그렇듯이 먹을 것을 전혀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별 미련없이 둘레길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이 웅장한 건물(광각렌즈 효과일 뿐이다)은 도봉산 주등반로의 시점을 알리는 도봉분소다. 여기서부터 도봉산 등산을 시작하면 비교적 무난한 코스로 오를 수 있다. 내가 가장 가 보고 싶은 코스는 사패산에서 도봉 능선을 따라 북한산 백운대로 이어진는 코스인데 부실한 체력으로 산 3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싶어 일단 간만 보는 중이다.


평일임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도봉산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 사진을 잘 찍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분위기가 괜찮아 보여 한 장 남겨 본다. 강북5산 중에 도봉산과 북한산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산이 아닐까 싶다. 사패산이나 불암산, 수락산과 같은 이름은 어쩐지 조금은 낯설다. 아무튼 서울의 북쪽으로 이렇게 방대한 산자락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도봉산 등산객들과 갈라져 다시 둘레길 코스로 돌아오면 한적한 길이 이어진다. 이쪽 길은 휠체어를 탄 이들도 둘레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길이라고 하는데 아마 둘레길 전 구간에 걸쳐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구간에 이런 시설을 마련해두면 물론 좋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경치가 좋고 접근성도 괜찮은 이곳에 마련해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길을 걷고 또 걸어 하늘의 파란색과 땅의 하얀색이 만나는 길을 끝까지 오르면 18구간 도봉옛길도 어느새 종착점에 다다른다. 이제까지 걸어온 둘레길의 여러 코스 중에 단 한 구간을 고르라면 이곳 도봉옛길을 추천한다.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고(난이도도 '하'다). 주변에 둘러볼 수 있는 곳들도 많고 경치도 꽤나 좋은 편이다. 계절 가리지 않고 걷기에 참 좋은 길이 아닌가 싶다.


아무렇게나 묶여 있을만한 녀석이 아닌데 묶여 있다 싶어 한참 서로 바라본다. 저 녀석은 저기 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까. 나는 저 녀석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겠지만 그래서 저 녀석에게는 금방 잊히고 마는 그런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저 개는 단 한 마리로 기억되고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기억 속에 맴돈다.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만남은 스치는 순간 바로 잊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평생에 걸쳐 기억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기억에 오래 남거나 혹은 바로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얼굴들을 떠 올려 본다. 힘들여 기억해보려 하지 않아도 곧 떠오르는 얼굴들은 분명 내 삶에 좋은 면이건 그렇지 않은 면이건 큰 영향을 준 이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친 후 잊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참 후회스러운 일이었어..라고 기억하거나 기억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다행이었어..라고 서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오랜만에 눈 덮인 산에 이끌려 걸어본 둘레길이었다. 이제 정말 막바지구나 싶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3구간. 두 구간은 하루에 걸을 수 있고 우이령길은 예약제로 운영이 되기에 편한 날을 잡아 걸으면 된다. 총 21개 구간 71Km에 이르는 길. 어쩌면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맺음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여러 의미를 주는 것 같아 또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둘레길 완주가 끝나면 북쪽의 산들부터 하나둘 다녀볼 생각이다. 아마 첫 번째 대상은 사패산이 아닐까 싶은데 언제가 될 지는 역시 정해두지 않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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