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인의 신작 시집인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의 첫번째 시를 읽다가 한 줄에 눈이 멎었다. 

'이미 떠나간 것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나는 이 행을 읽고 또 읽는다. 시인은 절반의 생을 길에서 보내며 비로소 떠나간 것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다한다.

나 스스로 이별을 결심하고 나 스스로 떠나왔음에도 나는 아직 작별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 했다.

아니 작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별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 이별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생각이나 가치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그 대상을 떠났다고 확신하면서도 마음 어느 한 구석엔가는 그 대상의 흔적들을 꼬깃꼬깃 접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미련이라 부르건 혹은 그 대상에 보낸 내 마음의 일부라고 부르건 상관없다. 

그저 나는 그것들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들인 마음이 아까워서 그동안 보낸 시간이 아까워서 그저 내 이기심에 붙들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에 대한 대답은 나 역시 시인처럼 길 위에서 찾아야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답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이별이 아플리가 없으니 말이다.


간송 전형필 서거 50주년을 맞이한 올해 간송미술관의 주제는 '진경시대회화대전'이다. 진경(眞景)이라는 말 그대로 '진짜 경치'를 다룬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되겠다. 원래 새벽같이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몇 가지 처리할 일들이 밀려 조금 늦게 길을 나섰다. 제법 오랜 시간 줄서기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간송미술관은 1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 15일씩만 여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기간동안에는 성북동 일대에 긴 줄이 만들어지는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평일이건 주말이건 할 것없이 어지간해서는 1시간, 조금 밀리면 2시간 정도는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이번 전시는 다음 주 월요일에 마치게 되니 아마 이번 주말이 가장 사람들이 몰리지 않을까 싶다. 간송미술관은 전형필 선생의 개인 미술관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잘 꾸며져 있고 정돈된 분위기를 생각하면 실망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로 정원이 펼쳐져 있지만 사람이 손을 많이 대 관리한 모양새는 아니다. 그냥 일반 단독주택의 정원 같구나 생각하고 둘러보다보면 어디선가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는데 미술관에서 기르는 하얀 공작이 우는 소리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의 좌측에 보면 공작이 살고 있는 우리를 만날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하얀 공작이다. 

미술관은 건물이 이리저리 닳고 닳은 모습의 외양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지 싶은데 이 느낌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서 더 확실해진다. 5월의 하늘은 무척이나 높고 햇살도 뜨거운 오후여서 줄을 선 많은 이들이 쉽게 지치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이 작게 난 길을 따라가면 입구가 보인다. 왼쪽에는 공작 우리가 있는데 다가서기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덩치 큰 공작들이 졸고 있는 틈에 동네 참새들이 우리에 들어가 먹이를 먹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정원이 오히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도 같다.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각종 나무와 풀들을 보면서 만약 이 정원이 계획적으로 정돈이 되었다면 매력이 적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술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전시를 하는데 1층은 비교적 좁고 2층은 넓은 공간이다. 입구 즈음에는 어디선가 보내 온 각종 화환들이 즐비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이들의 화환들도 눈에 보이는데 그네들은 직접 이곳에 들러 전시를 보고 갔을까?

제멋대로 자라는 나무들과 풀들 사이로 봄의 화창한 기운이 느껴진다. 12시쯤 시작한 줄서기가 거의 마무리된 시간은 1시 30분 쯤.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기다린 셈인데 내 뒤로 줄을 선 아주머니들의 끊이지 않는 수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입구에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적은 종이가 아무렇게나 붙어있다. 오히려 정겨운 느낌이다. 입구를 들어서 왼쪽의 전시실 위에는 오세창 선생이 원래 이 미술관에 지어 준 이름인 보화각(寶華閣)이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어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둔다. 중간중간 휴대폰으로 몰래 사진들을 찍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진경을 주제로 삼은 이번 전시는 단연 겸재 정선의 독무대처럼 보였다. 강희언과 최북, 이인문의 그림도 종종 보였지만 가장 많은 작품은 역시 정선의 그림들이었고 눈에 익히 익은 그림들과 처음 보는 그림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1층은 비교적 둘러보기가 쉬웠지만 2층으로 가는 길은 또 다시 줄이 길게 이어졌다. 2층에도 역시 정선을 만날 수 있었고 단원과 혜원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허나 김홍도나 신윤복의 너무 잘 알려진 그림들은 선보이지 않았는데 미술관의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진경시대회화대전에서 미인도를 만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어찌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사실 전시된 작품들은 보기가 쉬운 편은 아니다. 아주 많은 수의 작품도 아니고 작품마다 해설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와 생몰년도, 작품명이 전부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은 불안해 보이고 유리는 선명함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피로와 싸워가며 이곳을 찾는 이유는 진품에 대한 열망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곳의 작품들은 인터넷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고 여느 서적을 들춰봐도 실제로 이곳에 와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한 설명과 화질(?)로 감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제품일 뿐이다. 때로는 복제품이 진품보다 우수한 경우도 종종 있고 특히나 디지털 복제의 경우 어느 것이 진품인지조차 규정하기 어려운 요즘같은 시대에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이 직접 붓을 대 그린 그림을 만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제법 크지 않을까. 그렇게도 흔하디흔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를 찾는 이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간송미술관의 전시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여러 수고를 들여야 한다. 매일 같이 여는 것도 아니고 1년에 2번이다. 입장하기 위해 성북동 길가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 흔한 자판기도 하나 없다. 전시장은 복잡하고 불편하며 모처럼 열린 전시회를 찾아도 보고 싶던 그림을 한 번에 만나기도 어렵다. 줄을 서는 시간이 그림을 보는 시간보다 길고 그림 하나를 진득하게 볼라치면 뒷사람의 눈총도 따갑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앞서 적은 것처럼 진품에 대한 향수때문이다. 복제되지 않은 최초의 순수함을 간직한 원본말이다. 복제가 당연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있다. 굳이 들뢰즈의 시뮬라르크를 언급할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의 삶은 어느 것이 원본이고 어느 것이 복제인지 알 수가 없는 일상이다. 원본도 없는 복제가 원본 행세를 하기도 하는 데 겸재 정선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니 대단한 것이 아닌가!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진보다 그림에 더 가치를 두는 이유는 원본의 복제 방식의 차이때문이다. 그림은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노력이 주를 이루는 반면 사진은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기계의 손을 거치기 때문이다.(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된 이후에는 더욱 더) 물론 사진에도 감성이 담겨 있지만 그림에 비할 바는 아니지 싶다.

아무튼 전형필 선생이 후세에 남긴 것은 복제되기 전의 원본 바로 그것이고 오늘도 그 원본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원본에 대한 향수 나아가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자아에 대한 향수때문에...


후기...

미술관을 나서는 길에 나는 원본을 복제한 신윤복의 쌍검대무를 다시 복제한 그림을 하나 손에 집어 들었다. 진경시대회화대전에 와서 산수화보다는 인물화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오늘 전시되지 않았다. 

여러가지로 모순적인 선택이긴 하다. 전시회의 주제와도 전시된 작품과도 엇갈린 복제의 복제품을 집어 들었으니..

하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입구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끌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 작품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진경시대회화대전을 보러 와서 전시되지 않은 다른 주제의 작품을 사 들고 온 것. 어쩌면 우리 삶의 모습은 아닐까?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실상 살아가는 동안 정말 마음을 비우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마 그런 상황이라면 대개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한 경우가 아닐까.. 이미 포기한 상태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본전이니 마음을 비우기가 쉽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마음을 비우기란 쉽지가 않다. 이렇게 마음은 소유욕, 욕심과 밀접하다.

손에 쥔 것을 놓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두 손 가득히 무언가를 잡고 있으면서 또 다른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다리 위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물고 있는 고기를 얻기 위해 짖어버리는 개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우리네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소유욕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때로는 위의 개의 우화처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얻으려 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마음을 비워야 얻는다는 것. 손에 쥔 것을 놓아야 얻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살아간다. 약하디 약한 것이 인간이다..권력을 원하고 재력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고.. 세상의 어떤 척도가 되는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무엇인가 없음에 대한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많은 철학자들이 익히 이야기한 것처럼.. 분리에 대한 불안. 참 적당한 해석이다.

결국..마음이 공허한 것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무엇인가를 얻고 추구한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집착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갈 수록 그 채움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음이 허전하면 허전할 수록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 가고 사람에 대한 집착이 커 간다. 그리고 그 집착은 욕심이 되고 때로는 폭력이 된다. 무엇인가 없다는 것은 이렇게 인간을 힘에 의존하게 만든다.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돈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결국 공허함에서 비롯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핑계로 국민과 민족을 내세우고 돈을 추구하는 핑계로 행복과 생활을 내세우고 성욕을 채우기 위한 핑계로 사랑을 내세우면서 정작 추구해야 할 본질들은 저 멀리로 던져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애초에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조차 잊게 된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허나 정작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도 못하면서 다른 것들을 향해 주먹 쥔 손을 뻗는 그런 삶을 우리네 인간들은 이제껏 반복해오고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모든 것을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그럼에도 먼지 한 톨조차 놓지 않으려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는 90년대 학번이었던 내게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리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절망.. 그런 여러 감정들 속에서 고시라는 당시는 어쩌면 당연한(그리고 현실을 외면하는) 선택을 해야했던 내게 이 노래는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또 찔렀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이곡을 들었을 때 여전히 그 가사 속의 모든 상황들이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당시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내게 던져진 질문은 같았고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적당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 어쩌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바닥에 깔아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것을 나는 이리저리 외면하고 모른 척했다.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 순간만 넘기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그 어려움만 극복된다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그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다시 주저 앉아 버리고마는 나태함과 안일함.. 

그리고 지금 90년대 학교 도서관의 내 모습으로 현재의 나를 다시 일치시키려 한다. 감정이나 의지나 노력, 사랑같은 것들은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줄 수가 없기에 나는 이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단어들로 가득 차 있는 법전과 법서를 펼치고 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대의 흐름에 귀를 막고 가끔 마주치게 되는 순진한 인연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게 있어 가장 큰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마주쳐야 했고..이걸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차일피일 시간만 미뤄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 미룸이 얼마나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미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 사실과 맞부딪히기가 너무 싫었는데..이젠 뭐랄까.. 참 초연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 녀석을 다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0년대의 어느 날. 최루탄 냄새 매캐한 도서관에 앉아 선배들, 친구들과 나누던 이야기들, 수줍은 얼굴로 지나치며 눈을 내리감던 첫사랑 그녀의 모습, 붕어빵 한개로 하루를 버티며 스스로 대단해했던 어느 유치한 날들, 지하철 역 아래 소주집에서 못 마시는 술을 마시며 시대를 이야기하던 나날들..그 모든 풍경들이 문득 새롭게 컬러가 업혀지며 내눈 앞에 다시 선명하게 보인다. 같은 기억도 어떻게 되돌리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지금의 나는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아쉬운 감정을 느끼지 않고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하는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것이 가족이건 혹은 다른 누구건 그들이 내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만큼 내가 살아온 날들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던 과거 역시 내 삶이었다.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사람들 모두 현재의 나를 만들어온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이젠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편하게 과거를 마주할 수 있고 말을 건넬 수 있다.

다시.. 시간을 그렇게 되돌린다. 모든 기억을 안고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 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호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집 빠른 차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2.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사랑을 할 때 서로 주고받는 대화들은 참 절절하기가 그지 없어서 당장 단 하루라도 상대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별을 앞둔 시점에서는 그 감정과 언어의 표현이 극에 다다라게 되는 데 상대의 기억을 평생 안고 가겠다거나 다른 사랑을 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란 감정을 무디게 하기 십상이다. 어지간한 의지 혹은 이전의 대상에 대한 확신이 없고서는 하루하루 날이 바뀔 때마다 감정 역시 변화하기 마련이다.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다른 이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 일도 있는데 애초에 이건 서로의 관계가 사랑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관계였을 뿐이다. 그러고보면 나 역시 살아오는 동안 나 스스로의 경험 그리고 주변의 경우를 종합해보면 이말이 어느 정도 타탕하지 않나 싶다.

어쩌면 그렇게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감정에 취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밥먹여주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흔히 사랑과 착각을 하는 감정이 연민, 외로움에 대한 보상 혹은 성욕이다. 상대가 안쓰러워 보여서 정을 주다보니, 혼자라는 외로움때문에 그리고 성욕을 풀기 위하여..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다. 중첩은 될 수 있지만 독립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해소책에 불과하다. 사랑은 이유없이 상대가 존재한다는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앞선 감정들은 본인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자신의 순수한 이기심일 뿐이기에 상대가 누구라도 별반 차이는 없는 감정이다. 잠시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합리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새로이 나타난 대상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그러고나선 앞선 과정들을 또 다시 겪게 된다. 상당히 많은 관계들이 이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 지난 기억 속에서 과연 순수하게 상대만을 바라보았던 적은 언제였나 물어본다. 낭패스럽게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 역시 내 이기심을 감추고 욕망을 추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날이 갈 수록 순수한 사랑을 찾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만큼 때가 타고 있다는 말이고 이 때를 지우지 않는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 않을까 싶다.

만약 사랑에 실패했다거나 아직 사랑을 찾지 못 했다면 그것은 상대의 탓도 아니고 나를 못 알아봐주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자기자신의 문제고 자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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