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을 읽을 때는 굉장한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게 되면 보통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그 전율의 서책 목록에 덧붙인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격변기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겉으로 드러난 혁명의 충격만큼이나 인간의 내면을 철자하게 파고 들어 있어 사실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사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이책이  -물론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분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우리에게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선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라이즈의 일부 장면을 이책의 내용을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고 밝힌데서 비롯된다.프랑스 혁명과 배트맨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관계지? 한발 더 나아가 책의 결말부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예수의 모습마저 볼 수 있다. 아마 내가 잡아낸 부분보다 더 많은 관계들이 이책에는 들어있을 것이다. 한번의 독서로 모든 것을 느낄 수는 없다. 적어도 두세 번은 곱씹어 읽어볼 책이다.

아래 사진은 이책의 초판본인데 영문 제목을 들여다보자. 'Tales'라고 써도 되지만 디킨스는 'A Tale'을 택했다. 작가의 의도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한편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책은 하나의 이야기만 담고 있지는 않은데 여러 이야기들이 결국은 하나로 모이고 그것이 디킨스가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여전히 각각의(Each)라는 단어가 이책에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도저히 하나의 이야기로만 읽고 넘기기에는 아까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차라리 'The'를 붙이지는 않았을까? 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이책은 주석까지 합쳐 588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처음 책을 집어들고나면 '이책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프랑스 혁명 당시의 런던의 어느 길거리를 걷고 파리의 어느 선술집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해있다보면 마지막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전 특히 명작이 주는 감동이란 대개 그런 것이어서 현대 문학 작품들이 좀처럼 줄 수 없는 일종의 은총에 가까운 매력이다.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기본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인 명예, 사랑, 재물 등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갈등이 휘몰아친다. 물론 책이 씌여진 시기를 생각하고 디킨스의 장황한 어투를 생각하면 쉽게 쉽게 문장이 읽어지지는 않지만 그 안에 펼쳐진 방대한 서사시를 읽어나가다보면 그런 부수적인 어려움이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이책의 주제는 사실 독자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된다. 목숨을 내줄만큼 숭고한 혹은 무의미할 수도 있는 '사랑'일까? 시대의 풍파 속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계급'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욕망"일까? 어느 주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줄거리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책만이 가지고 있는 큰 특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주제들만 따로 끌어내어 연결을 시켜도 훌륭한 한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책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Recalled to Life"

Water

Darkness and light

Social justice


책을 읽어가다보면 책의 문체가 희곡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두 도시 이야기는 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외국에서는 6편의 영화와 한편의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국내에서 구해볼 방법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는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며 시작되고 결국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며 끝이 난다. 런던파리라는 두 도시에서 우리는 마치 흑 아니면 백과도 같은 극단적인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고 그 극단이 부딪혀 서로를 파괴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양 극단의 종말은 '너무나도 비슷함'으로 마무리된다. 아마 이 소설만큼 극단적으로 인간의 감정의 대립을 묘사한 소설은 많지 않을 듯하다. 복수와 용서, 미움과 사랑이라는 이 양극단의 감정은 최종장에 이르러 마치 예수의 순교와 같은 대속으로 마무리된다.

이 소설의 주해를 달고 있는 리처드 맥스웰은 이 양극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이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 양극단은 파리와 런던이라는 두 도시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사실은 파리가 곧 런던이고 런던이 곧 파리였던 셈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건 인간의 이런 모습은 다르지 않음이고 또한 그 해결 방법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디킨스는 이야기하고 싶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디킨스는 여느 작가와는 달리 '소외'에 초점을 둔 작가였다. 혁명이라는 세상이 소용돌이치는 그 와중에도 귀족이나 혁명 세력이 아닌 소시민들 그것도 철저하게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진 나약한 소시민들의 삶에 집중한다. 이점에서는 우리는 까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통 관심을 둔다. 어느 왕이 어떠했고 어느 수상이 어떠했고 혹은 어느 신하가 어떠했고는 자세하게 다루지만 정작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다수의 사람들 -즉 우리들- 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지배자는 수가 적고 피지배자는 수가 많아 일일히 이름을 언급하기 어렵다는 식의 이론은 철저하게 권력과 힘에 기댄 역사서술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왕'이 아니라 '갑돌이와 갑순이'인데 우리는 갑돌이와 갑순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디킨스는 바로 그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처절하고 진솔하고 때로는 뼈에 사무치기까지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예수의 모습으로 죽어간 주인공의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어쩌면 정말 소설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디킨스는 그 죽음.. 예수의 대속(Redemption of Christ)과도 같은 그 죽음을 결코 값싸게 다루고 있지 않다. 숭고한 죽음이란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이라는 점. 이점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등장하는데 바로 다크나이트인 웨인이 그의 유언장에 적은 그 내용이다.

'I see a beautiful city and the the brilliant people rising from this abyss. I see the lives, for which I lay down my life. Peaceful, useful, prosperous and happy. I see that I hold a sanctuary in their hearts And in the hearts of their decedents. Generations ends. That's the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than I had ever done. and It's a far, far better rest that I go to...'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내가 지금 하려는 행위는 지금까지 해온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걸었던 어느 길보다 훨씬 평안한 길이리라"

앞서 마지막 장에 한참을 머물게 된다고 적었는데 실제로 그렇다. 사실 책의 줄거리나 내용을 인용하지 않는 것이 내 서평의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이 마지막 문장을 적지 않고서는 이책이 주는 강렬한 느낌을 옮겨오기 어려울 것같아 적어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의 개인의 삶이다. 그 삶에는 귀하거나 천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누구도 인간이라는 존재인 이상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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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뷰와 반디앤루니스에서 선정하는 금주의 리뷰에 선정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__)


허리디스크. 요즘은 10대 청소년들에게도 익숙한 질병 중의 하나다.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무엇보다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보니 한창 성장할 시기에 척추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다. 비단 청소년들뿐 아니라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허리디스크는 일단 신체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뼈대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발병하면 일상생활에도 큰 장애가 될 정도고 그로 인해 다른 신체기관에까지 이상을 초래하는 심각한 질환이다. 

직장인들 허리 디스크 비상!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은 '디스크에 걸리면 수술을 하면 된다'는 잘못된 상식이다. 사실 어지간해서 몸에 칼을 대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소위 양방에서는 아무래도 외과적 처치나 주사 등의 요법이 주를 이루게 되고 항생제 등의 강한 약물 치료를 동반함으로 인해 다른 신체기관에도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양방을 이용하지 않고 디스크를 치료할 수는 없을까? 자생한방병원이라는 곳을 아마 한 번쯤을 들어봤지 싶다. 자생한방병원은 수술 없이 척추 및 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보건복지부 지정 국내 최대 척추전문 한방병원이다. 1990년 자생한의원으로 시작, 1999년 자생한방병원으로 거듭난 이래 현재 280여 명의 척추전문 의료진이 30여 개의 세분화된 척추관절 전문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양한방협진 시스템을 도입하여 MRI, X-Ray 등 첨단 영상 진단기기로 척추 질환을 진단하고, 20여 년의 치료 노하우로 연간 15만 명을 수술 없이 치료하고 있다.

한방에서 척추치료가 가능해? 라는 의문이 일단 들 수밖에 없는데 그런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쓰인 책이다. 


우선 실제 사례를 들어 독자의 궁금증을 직접적으로 해소하고 있다. 종합병원에서 수술해도 안 낫는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에게 실제 이곳의 치료를 통해 완치된 환자들의 사례는 호기심을 자극할 뿐 아니라 치료에 대한 신뢰를 쌓는데 큰 역할을 한다. 소개된 여섯 가지 사례는 실제로 환자들의 경험담이기때문에 비슷한 질환을 앓고 있다면 눈여겨 보도록 하자.

특히 3장에서는 실제적으로 자생한방병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허리디스크를 치료하는지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추나약물요법, 추나수기요법, 침요법 등 치료방법을 자세히 적어두고 있어 한방으로 디스크를 치료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쉽게 풀어주고 있다. 아마 책이 여기까지 소개를 하고 있었다면 '에이, 그거 병원 안내 책자 아니야?'라고 신뢰가 급속히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4장부터는 그동안 임상 사례를 통해 검증된 디스크의 원인, 진단법, 자기치료법, 생활요법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디스크가 발병하지 않은 경우라도 미리 이 자료들을 보고 예방도 할 수 있고 디스크 환자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자가치료를 할 수도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이책과 비슷한 류의 책들이 꽤 딱딱하고 전문용어들을 나열하며 독자들을 피로하게 하는 데 반해 이책은 알기 쉬운 단어와 사례 그리고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어 편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글로 써 있는 것보다 위의 그림으로 보니 좀 더 와닿지 않는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차림이지만 실제로 허리에는 좋지 앟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복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떻게 하면 병원에 가지 않고도 평소에 디스크를 예방할 수 있을까? 이책을 읽어보면 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것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겪는 일 중의 하나인데 아마 디스크가 발병한 분들의 대부분이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별로 무거워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고개를 숙이고 물건을 덥썩 집어들다가는 허리에 바로 무리가 간다. '에이, 나는 젊은데' 라거나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는데 아무 이상 없던데?'라며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위 그림을 보고 당장이라도 습관을 바꾸도록 하자.

그렇다면 과연 나는 디스크 증상이 있을까?

여러가지 방법이 소개되고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직접 해보기도 쉬운 방법이다. 일단 이 그림을 봤다면 바로 누워서 직접 해보도록 하자. 다리가 잘 올라가는가? 아니면 당기거나 저리는 증상이 나타나는가?

이책은 이렇게 앞부분에서는 실제 사례를 통해 자생한방병원의 치료법의 우수함을 강조하고 있고 뒤이어 허리디스크의 원인과 치료법 그리고 자생한방병원에서 어떤 식으로 디스크를 치료하는지를 상세히 소개한 다음 일상 생활 속에서의 디스크 관리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양방 못지 않게 한방도 주특기 분야가 있다. 자생한방병원은 무엇보다 디스크에 특화되어 있는 병원이다. 아직도 긴가민가 망설여진다면 이책으로 미리 접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이책의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집에서 누구나 쉽게 디스크의 예방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운동법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어려운 방법은 전혀 없고 대부분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고 설명 또한 자세히 되어 있으니 틈틈히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해주면 꽤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저자가 이책에 대해 "연 90만회의 임상경험과 치료법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축적된 디스크 치료 노하우가 이 책에 집약돼있다. 또한 다양한 척추 질환의 사례와 함께 원인과 치료법, 예방법 등 환자들이 궁금해할 디스크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해 알기 쉽게 다뤘다. 허리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생활습관과 식습관, 스트레칭 방법도 수록하여 허리디스크 치료 및 예방에 참고하도록 했다."고 대단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디스크로부터 아직은 별 걱정이 없더라도 가정상비서적으로 비치해둘만한 책이다.





이번 예스24의 리뷰 서적은 제목이 제법 자극적이다. 책표지 색도 그렇고 '뭔가 해 보자'는 도전적인 느낌이다. '차'다. 내게 차는 아무 이유없이 좋은 그런 존재다. 처음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을 할 때만 해도 내 안에 그런 폭풍과도 같은 기질이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내 차를 10년이 넘게 몰면서 느낀 가장 큰 감상은 '내가 차고 차가 나다'라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생각이다.

저자 신동헌은 네이버에 조이라이드라는 블로거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혹 조이라이드라고 하니 '그 사람'을 떠올릴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전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신동헌의 글이 마음에 드는 것은 일단 차를 좋아한다는 점, 건방질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차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물론 차란 그저 이동수단일 뿐이라는 분들도 많겠지만 나처럼 어디선가 들려오는 배기음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차는 또 다른 나 이상의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절세미녀가 수영복을 반만 입고 유혹해도 포르쉐 911의 엉덩이에 적혀 있는 Turbo(물론 끝에 S자가 하나 더 붙어있다면 금상첨화)라는 글자에 더 눈이 가게 된다. 8등신 미녀의 선이 아름다운가? 아니다 아우디  R8의 옆라인을 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와도 8기통, 12기통의 그르렁거리는 배기음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미녀의 미끈한 살결보다 땀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가죽 스티어링휠이 더 매력적인 것이다. 내게 차란 그런 존재고 신동헌의 이책은 그런 내 마음을 여지 없이 흔들어 놓는다.

저자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인간 수컷들이 바퀴 네 개 달린 물건에 정신을 빼앗겨 버리는 정확한 이유'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시승기가 차지하고 있다. 시승기는 필자에 따라 정말 천지차이가 날 정도로 다른데 신동헌의 '말빨'로 듣는 시승기는 역시나 피를 끓게 하는 매력이 있다. 시승기 이외에도 운전법, 길들이기 방법, '남자라면' 끌리는 튜닝 등등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저자의 말투가 조금 거슬리는 분도 있겠지만.. 차에 대해 시원하게 풀어준다는 점을 생각하고 그냥 편하게 읽으면 된다.

포르쉐는 정장을 입고도 탈 수 있는 스포츠카다. 머리가 희끗한 백발의 노인이 타기에 어울리는 차지만 그 성능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포르쉐'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느낌이란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혹은 그 이상의 차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강하다. 나 역시 포르쉐는 광신도라면 광신도인데 저 개구리 같은 눈매에 어쩌다가 빠지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언젠가 911 터보가 시동을 걸고 천천히 도로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던 적이 있다. 포르쉐의 마력이란..

데라야마 슈지는 '일점호화주의'라는 독특한 말을 만들어냈는데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알파 로메오를 끌고 다니는 '한방'을 이야기한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객기도 그런 객기가 없고 현실을 외면한 무책임의 절정일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차에 한방을 거는 인생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난 여전히 믿고 있다. 물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농담으로 '남자가 죽기 전에 문 두 개 달린 차는 타야지'라고 난 이야기하곤 하는데..사실 농담만은 아니다. 그래서 생애 마지막 차를 고른다면 역시 문 두 개 달린 차(스쿠프나 포르테 쿱도 있긴 하지만...) 를 고를 생각이다. 독거노인이다보니 먹여살릴 처자도 없으니 적어도 그런 부분에서는 자유롭지 싶은데...

문 두 개가 달린 차 중에서는 선택의 폭은 제법 넓다. 끝판왕(내가 생각하는)인 911 터보S로 간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지만 어지간한 로또 당첨으로는 무리지 싶고 역시나 BMW E46 M3이다. E46 M3는  벌써 나온 지가 12년이 넘어가고 있으니 앞으로 한 10년만 더 있으면 어찌어찌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가격은 출고가에 비하면 바닥을 치고는 있다.

E46 M3은 요즘 나오는 차들에 비해 출력면에서는 형편없이 낮다. 대충 300마력 정도니까 제네시스 쿠페 3.8보다 출력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녀석이 마음에 든다. 이유? 남자가 차를 좋아하는데 이유는 없다. 미녀를 보면 기분이 좋듯이 난 이 녀석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게 전부다. 하나 더 덧붙이면 이제는 너무 편안한 승차감의 스포츠카들에 대한 거부감이랄까?

이제는 고리타분한 디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E46 M3 그나마 튜닝한 차 사진을 골랐지만 뭐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아무튼 오랜만에 꽤나 역동적인 책이다. 사실 자동차 시승기나 기타 자동차 정보는 인터넷에 널릴 대로 널려 있다. 오히려 동영상도 넘치고 있으니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이책으로 만나는 자동차들은 왠지 느낌이 다르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마음 내킬 때마다 열어볼 수 있으니 그것도 큰 매력이다. 선명한 사진과 적나라한 시승기는 읽을 때마다 불쑥불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한다. 

남자에게 차란 어떤 존재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지만 내게 차란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삶의 원동력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말일까?


얼마 전에 문학동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이 선보였습니다. 하루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은데 제 나름의 기준으로는 '해변의 카프카' 이후 변절했다고 단정을 지어버리고 있던 터라 이전만큼의 호감은 가지고 있지 못하죠. 게다가 1Q84에서 아주 결정타를 날려서 이제는 하루키의 책은 읽지 않겠다고 까지 선언을 해 버렸지요.

그럼에도 그의 신작에는 끌릴 수밖에 없는데 욕을 할 때는 하더라도 일단 읽기는 해야 한다는 묘한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이번에 나온 에세이 걸작선은 총 5편입니다. 제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과거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지요. 즉 '변절 전의 하루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집어든 책은 바로 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입니다.

50편의 짧은 단편들이 모여 있는데 그가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글들이라는군요. 실려 있는 단편들은 굉장히 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데 이제까지 접하지 못 했던 하루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꽤 흥미 있었습니다. 물론 50편 모두가 흥미진진한 것은 아니고 어떤 작품은 지루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페이지를 넘겨 가던 중에 압권인 단편을 발견했는데 책의 제목과도 같은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편입니다. 이 단편이야말로 하루키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술자리에서 나온 이 문장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정말 하루키다운 문장입니다. 물론 그가 직접 한 말은 아니지만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날 정도죠. 그리고 그 묘사가 참 하루키답기에 이책에서는 이 단편을 추천해봅니다.

아무튼 사물에 대한 인식의 부여..랄까요. 그런 것을 참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연치 않게 듣게 된 자기가 쓰는 연필이 여고생 같다는 말이 그 자리를 떠나서도 머릿속에서 영 떠나지 않고 연필을 볼 때마다 그런 묘한 생각이 드는 현상에 빠져 꽤나 고생을 하는 그의 모습이 아주 적나라합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성적인 의미 부여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난감해 하는 모습이 재밌습니다. 

꽤 재밌는 상황이지요? 아마 일상 생활 중에 저런 식으로 의미 부여가 되는 경우를 제법 많이 겪어 보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아침에 가장 먼저 보는 버스가 1번 버스면 하루종일 재수가 좋을 거라고 집을 나섰는데 1번이 연달아 온다던가 하면 하루종일 싱글벙글 하게 되죠.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더라도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면 어쩐지 흐뭇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부여가 하루키의 경우처럼 성적인 거라면 꽤나 난처한 상황도 많겠지요. 그것도 잠시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어떤 물건에 그런 의미가 새겨지면 말이죠. 그런 경험들이 혹시 있으신가 모르겠네요. 있으셔도 여기에 답글을 다실 정도로 대담한 분은 안 계시겠지만요..^^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는 하루키는 오래 전 하루키에게서 받았던 강한 인상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었습니다. 앞에 하루키의 변절이라고 적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쓰실 바는 아닙니다. 뭐랄까 '상실의 시대'로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보였던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와 감정의 묘사가 이후에는 점점 상업적으로 확대된데서 온 저만의 아쉬움이니까요. 

언젠가 1Q84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볼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내가 아는 하루키가 아니다'는 문장으로 요약할 정도랄까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천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남자다. 그리고 작가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의 책에 대한 선입견이 제법 컸는데 뭐랄까 인기에 영합하는 그렇고 그런 류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은 아닌가 오해하고 있었다. 마치 최근의 하루키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전혀 읽지 않았었는데 반전이 이루어진 것은 '타나토노트'였다.

이후로 그의 책을 마치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듯이 읽었는데 흔히 알려진 3부작이 준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물론 '신'의 마지막 결론 이후 꽤 오랜동안의 사색이 필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나무'는 단편집이다. 그의 다른 책처럼 독자의 부담이 비교적 적은 책이다. 물론 페이지가 적을 뿐이지 담겨 있는 내용들을 고민하자면 또 끝도 없다. 그럼에도 군더더기없이 짧게 끊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초창기의 하루키 작품을 읽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읽어나가는동안 하루키의 단편과 제법 공감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책에 실린 단편들 그리고 그 단편에서 이어져나오는 장편들을 굳이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책의 내용 그러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활자에 푹 빠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눈 앞에 펼쳐진 내용들을 모두 소화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굳이 생각의 영역을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책은 특히나 연관성이 대단히 넓은 책이기에 무엇보다 '단절'작업이 크게 요구된다. 그래야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낙에 신출귀몰한 이야기와 구성 그리고 영역을 가지고 있는 베르베르이기에 이 방법이 이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 나름대로 정해버린 것이다. 물론 수많은 연관성들을 모두 아울러 가며 읽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오직 이책에만 빠져보고 싶다면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8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담겨 있다. 각각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모음집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을 듯 하여 적지 않겠지만 아무 작품이나 눈이 가는 것을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 가능하다면 베르베르의 장편들을 읽은 다음에 쉬어 가는 시간에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그의 장편이 주는 피로감을 풀기에 이 단편들은 제법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작품의 어느 부분만을 네모난 모양으로 잘라서 찍어보았다. 이것으로도 의미의 전달은 충분하다. 굳이 모든 문장을 한데 엮어 순서대로 맞추어 놓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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