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건네진 책은 '스님의 청소법'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입니다. 게다가 걸레 한 장으로 삶을 닦는다는 수식어까지 붙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청소와 수행은 어떤 관계가 있고 그것이 인생에는 또 어떤 영향을 줄까 궁금해집니다.

수도자들에게 있어 청소는 상당히 중요한 자기수양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책을 통해 불교의 청소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가톨릭의 수도자들에게도 청소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만이 아닌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놓일 자리에 제대로 놓는다는 말이지요. 한번 지금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세요. 온갖 물건들이 제자리에 바르게 정리되어 있으신가요?


책에 실려 있는 내용들은 어찌 보면 새로운 것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위의 목차를 가만히 들여다봐도 '아, 다 맞는 말이네'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굳이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말이죠. 하지만 이책의 의미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스님이 직접 실천한 뒤에 그 이유와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그것이 실행할 수 없다면 공염불에 그치는 법입니다. 수많은 힐링서적들이 유행하는 요즘이지만 저자가 직접 실천을 하며 증명까지 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책의 구성이 비슷해 살펴보니 예담에서 나온 책입니다. 재생지 특유의 진한 향과 글이 꽉 차지 않아 여유로운 편집 그리고 큼직한 폰트의 배치가 특징이죠. 다만 이책은 '색'을 써서 강조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진이 들어가있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수행'이라는 틀 안에서 '색[色]'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실 청소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거의 매일 이루어지다시피 하는 아주 사소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마치 살림이 그렇듯이 청소라는 것은 해도 티도 잘 나지 않고 막상 하는 동안에는 손도 많이 가고 신경도 제법 쓰이는 꽤나 피로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보니 청소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겠지요. 하지만 청소를 하지 않으면 금세 티가 납니다. 책상 위에 샇인 먼지들이 하루만 지나도 손가락에 묻어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그 청소를 즐겁고 하고 싶은 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변화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적은 것처럼 청소란 버리는 것만이 아닌 제자리에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방 안에 있는 수 많은 물건들 중에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간직해야할까요? 언젠가는 쓰이겠지하고 구석 어딘가에 넣어두는 것은 일종의 낭비입니다. 스님은 차라리 그런 것들을 바로 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공감은 가지만 막상 실천해보려면 쉬운 일은 아니겠죠? 특히나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들은 그 처리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그 물건을 주기 위해 들인 노력이 컸다면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 낫다'고 말이죠. 제법 명쾌한 해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물건들을 제자리에 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쓰임새를 내가 알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내가 그 쓰임새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고 한편 생각해보면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방 안을 하나둘 정리해나가다가 어디에 두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바로 위에 적은 '버리는 일'을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쓰임새가 있는데 내게는 딱히 쓸데가 없다면 그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결국은 이런 맥락이 아닐까요.


스님은 청소하는 행위 자체에 또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그 행동 자체에 말이죠. 청소를 하는 동안 그 행위 자체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다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정소하는 행위 자체를 번거롭거나 거추장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가 함께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청소라는 행위와 그 결과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하나둘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수행과 다름없다는 것이 스님이 끝내 건네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지금 앉아계신 사무실의 책상이나 방 안의 모습이 자신의 마음속이고 자신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봤을 때 얼마나 정리되어 있고 깨끗한가요? 혹 지저분하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손을 들어 하나둘 치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지요. 그렇다고 새로 청소도구를 사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어지간한 청소는 몸과 걸레 한 장이면 충분하니까요.


때로는 글보다 그림에서 더 많은 느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림 한 장, 사진 한 장이 건네는 말은 도무지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때 적당한 소통수단이 되지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글이 많은 책보다 그림이 큼직큼직한 책들을 읽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인생"을 설명하려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로 혹은 말로 그것이 쉬우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 한 장이라면 그것이 가능하지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책에 대해서는 뭐랄까 편견이랄까요 그런게 있어서 나이가 들면 읽지 않는 책정도로 치부했었지요. 사실 소설보다 만화책이 재미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어느날 제손에 이 큼직한 책 한 권이 건네졌습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라는 긴 이름을 가진 친구가 주인공이지요. 아이는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그러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열심인 그런 착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는 길에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악어가 나타나 장갑을 물어가기도 하고 산더미만한 파도에 옷이 모두 젖기도 합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는 그런 모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아이는 그런 일들에 불만이나 불평을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지각을 하게 된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어른"인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오는 길에 악어를 만나 장갑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느라 늦었다면 뭐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뭔가 마음이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일어난대로 느낀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사실을 말하고도 반성문을 300번이나 써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묵묵히 반성문을 적습니다. 무어라 반발을 한만한데 그러지 않았지요. 그것이 더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여러 번의 반성문 쓰기를 반복해야했지요. 아이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생겼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털복숭이 고릴라가 선생님을 잡아 천장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선생님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 도와 달라고 소리칩니다. 분명 아이의 눈에도 고릴라가 보이고 선생님을 잡아 천장으로 끌고 올라간 모습이 보였겠지요.


하지만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선생님이 이제까지 자기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줍니다. 이것이 이책의 마지막 장면인데 복수나 앙갚음을 해서 통쾌하다는 감정은 전혀 들지 않고 마음속이 뭔가 짠해오는 느낌입니다. 이책에 쓰인 글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글자만 따로 뽑아놓고 보면 한 페이지도 될까말까 하지요. 하지만 이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을 봐야 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말이죠. 그림의 구석구석에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이 담겨있으니까요.

이책은 아이들보다는 어른을 위한 책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아이들이 읽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제법 깊이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늘 자기가 바라보는 눈높이로 세상을 재단질합니다. 비단 세상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특히나 선생이나 부모와 같은 '교육'을 맡은 이들은 아이들에 대해 그 재단질을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경우 그 재단에 사용되는 자와 가위가 어른의 손에 들린 것이라는 데 있는 것이죠. 아이들의 눈과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과 순수함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던져 버립니다. 흔히 순수함이 사라졌다. 아이같지 않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어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든 것이죠. 어른의 잣대를 아이에게 들이대니 아이 입장에서는 그 자의 길이에 그리고 그 눈금에 맞추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순수함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어린아이뿐 아니라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일은 제법 많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참 오랜만에 읽은 그림책 한 권이 많은 생각과 가르침을 전해 줍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를 않는 하루였습니다. 





아주 작은 책이 한 권 도착했습니다. 종이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쩐지 정감어린 표지의 그런 책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라는 꽤 감성적인 제목은 다름 아닌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독자를 사랑하는 이라 부르고 그에게 이런저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필체가 워낙에 부드러워 글을 조금만 읽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딱딱하고 거친 말투가 익숙한 우리네들에게 이렇게 다정다감한 말투가 어색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누구라도 이런 말투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작은 책이지만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사랑을 고민하는 이, 일상에 지친 이, 건강한 삶을 원하는 이,외로운 이 그리고 이 순간 행복을 바라는 이..이렇게 다섯 경우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장을 분류를 해놓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페이지가 손길가는대로 펼쳐 읽어도 마음에 와 닿는 그런 매력을 가진 책입니다. 


저자가 이책의 글들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어떠신가요? 지금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세요. 만약 자신의 생명이 며칠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저자는 그 하고 싶은 일을 글로 옮겨 적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운명의 시간에 어떤 일을 후회하게 될지 이미 알고 계실텐데 저자처럼 그 일들을 바로 실행해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그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저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정말 어렵지요. 그렇게 간직해둔 '언젠가 해야할 일'들.. 마음속 깊이 묻어 둔 '할 말'들, '할 일'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요. 해야 한다는 부담을 떠 안은 채 말이죠.

각각의 장은 또 작은 이야기들이 소품처럼 펼쳐져 있는데 두 세 페이지의 길지 않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적어 줍니다. 해답이라고 적었지만 오히려 조언에 가깝습니다. 저자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책이나 영화나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라고 말을 건넵니다.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해봐요..라는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는 법입니다.

이책이 마음에 든 점 중의 하나는 편집인데 중요한 이야기는 다른 색과 크기의 폰트를 사용해 도드라지게 하고 있는데 재생지와 어울리면서 뭔가 흐린듯하면서도 선명한 색상들의 조합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제법 많은 양의 사진들을 함께 담고 있는데 종이의 특성상 제법 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오히려 선명하고 뚜렷한 이미지가 아니라 배경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힐링'이라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 있는 요즘이지만 정작 그런 홍보문구를 강조한 책들을 보면 마음의 치유를 받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책은 오히려 그런 말이 없음에도 '힐링'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런 책입니다. 보통 힐링이나 자기계발서들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좀처럼 실천에 옮기지 못 하는 이야기들을 되새기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 못 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다는데 큰 매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생각보다 우리 마음에 크게 다가옵니다.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고 말이지요.

표지에 보면 '내일이 아닌 오늘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이라는 문장이 적혀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미래와 꿈을 이야기할 때 이책은 현재와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점만으로도 이책이 가진 의미와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참 오랜만에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책을 접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습니다. 요즘은 책들도 너무나 급하고 빠른 패스트 북이 주를 이루는 데 이책은 말 그대로 슬로우 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가끔 몸이 지칠 때 하늘을 보고 큰 심호흡을 하듯이 이 작은 책 한 권으로 마음의 지침을 풀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역대 대통령과 같은 '국가적인 위인'의 이야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고 한다.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 역사가 길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정통성과 애국심을 키우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인데 이런 문화는 소위 '위대한 미국'을 자랑하는 영화와 같은 영상물을 통해 보다 확대되어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고 한다.


캡틴 아메리카..위대한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미국 이야기를 한 것은 '보고 배우기'에 가장 좋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의 삶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아주 형편이 없을 정도인데 우리가 아는 위인들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얼굴조차 알 길이 없는 오래 전의 인물들이라는 점은 분명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적을 것이다. 그나마 근래에 들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나 김연아, 박찬호 등과 같은 직접 그들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은 다행이랄까..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송일국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아무튼 서두가 길었는데 청림에서 꽤 흥미있는 책을 내놓았다. "나는 축구선수다"라는 단순하면서도 강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처음 내가 이책을 받고 든 생각은 오래 전 마이클 조던의 자서전이었다. 그의 자서전을 읽고 농구의 길로 빠져든 청소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내 눈 앞에서 살아있는 '영웅'의 삶과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들으며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은 정말 짜릿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책은 대단하다. 세계 각지에서 최정상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40명의 축구선수들의 어린 시절과 꿈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자랑인 박지성 선수의 이야기도 있다.


이책은 수익금의 일부가 유니세프로 전달되는데 유니세프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데이비드 베컴이 장문의 머리글을 달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글이 잡지나 TV 등에서 보는 인터뷰의 내용과는 다른 살아온 이야기, 꿈을 가지게 된 계기, 어떻게 그 꿈을 이루어가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이지 이런 글들이 베컴의 글까지 41편이나 있다는 것은 축구의 꿈을 키우는 청소년들에게는 황금같은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미래에 축구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온 우리 시대의 '영웅' 41명의 이야기는 마음을 찡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박지성의 글을 읽으면 오히려 요즘의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실 그렇다. 박지성은 유럽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쉽게 볼 수 없었던 시절에 축구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좋아하는 선수나 구단의 모든 것을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예전보다 꿈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많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다. 막연함으로 무조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던 박지성보다 우리 아이들은 훨씬 나은 여건이니 말이다. 


아마 이 시대 최고의 축구 스타는 메시일 것이다. 그러면 메시는 어떻게 축구를 하게 되었을까? '그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대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처럼 결정적인 말도 없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 새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별 것이 아닌 말 같지만 어떤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강렬하게 알려주는 문장이다.


페르시의 경우는 사고를 극복해냈다. 좌절할 수 있고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환경을 그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읽어 보자. 아주 작은 동기가 아주 작은 결심이 미래의 꿈을 이루는 커다랗고 결정적인 동기가 될 수 있는 예를 그는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일이건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페르시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그 자신감으로 세계를 재페했다.

이책을 처음 보게 되면 '이거 그냥 스타들의 자랑이야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페이지를 넘겨 보면 그들의 화려함보다 어린 시절의 고난과 힘겨움에 먼저 눈이 간다. 그리고 '아, 이런 사람들도 어려서는 이런 일을 겪기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중세 시대도 아닌 현대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사람은 없다. 

한권의 책안에서 우리 시대의 축구 영웅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이책에 실린 글들은 축구 영웅들이 유명해지기 전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는데 큰 가치가 있다. 선수들의 큼직한 사진과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니 축구팬들에게는 꽤나 좋은 선물이 되지 싶다.




자극적인 제목이다. 안철수의 표정도 우리가 익히 접하는 웃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책의 저자는 왜 그리고 무엇을 알리고 싶었을까?

대선을 맞아 대선주자들에 대한 책들이 정말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온다. 이런 류의 책들은 대개 두 부류인데 하나는 '용비어천가'이고 하나는 '불씨잡변'이다. 극단적인 칭송 아니면 비난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책은 조금 다르다. 용비어천가도 불씨잡변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도저도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의 성향을 파악해보자면 안철수에 대해 비판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무작정 하는 비판이라기보다는 조사에 기초를 둔 비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무언가 근거가 있다는 것은 글에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이책의 필자가 근거로 들고 있는 '사실'들이 정확한 '진실'이냐의 문제는 독자로서는 검증할 방법은 없으니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3명의 대선주자들은 정말 특이하게도 각 인물의 캐리커쳐가 명확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 '만들어진' 외양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박근혜는 어떻고 문재인은 어떻고 또 안철수는 어떻다는 식으로 정형화된 패턴이다. 아마 이 패턴은 대선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누군가 정권을 잡아 그 정권이 끝날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그런 패턴인데 이책의 저자는 안철수의 정형화된 모습을 하나하나 짚어 보고 있다. 본인 외의 가족사항에까지 펜을 댄 것은 드문 일이지 싶기도 하다.

부제로 달려있는 '우리는 정말 안철수를 알고 있는가?'는 그런 의도로 보인다. 갑이라는 후보가 좋으니 그의 모든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을이라는 후보는 싫으니 그의 장점까지도 비난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양비론에서 조금은 물러서 과거 그리고 현재의 상황과 행적들, 배경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는 점은 이책이 가진 의도 부분만 놓고 보면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의도'만이 이책의 유일한 장점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쓸 때 그 글이 필자의 주관에 의해 어떤 식으로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는지를 학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나 유익하다.

그리고 저자가 극구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시류에 편승한 책임은 분명하다. 제목이나 중제의 선택이나 필체에 이르기까지 그런 부분들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책을 읽은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모두 접해봐야 한다는 판단때문이다. 콩깍지가 씌워진 양 좋으면 무조건 좋다는 식으로는 누군가를 진정 좋아할 수 없다. 단점도 정확하게 알고 그 단점마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실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의도는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음에도 '이책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아무튼 앞서도 적었지만 정치적인 서적은 선택을 할 때 신중함을 요한다. 스스로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책을 일단 펼치고 읽어나가다보면 필자의 감정에 빠져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까지 이르려면 상당히 필자의 필력이 우수해야겠지만- 시대적인 흐름이나 상황 등에 휩쓸리다보면 그런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떤 책을 읽건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차동엽 신부가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에 나쁜 책은 없으니 말이다. 그책을 좋게 혹은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다.


안철수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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