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벗의 무따기(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는 특히 일본어 편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책은 프랑스어다. 과연 이전의 일본어 편에서 쌓은 명성만큼 이번에도 따라만 하면 충분할까? 프랑스어는 영어의 어원이 되는 데다가 유럽은 물론 세계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하지만 특히 한국 남성들에게는 어색한 언어가 또 프랑스어다. 보통 고등학교에서 남학생들은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탓인데 요즘은 어떤가 모르겠다.


책을 펼치면 학습 진도표가 보인다. 2개월 과정이다. 언어를 배우는 책에는 이렇게 계획표를 저자가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특히나 초보자들은 하루에 어느 정도 공부를 하면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보통 책을 보면 앞부분은 지저분하고 뒤로 갈 수록 책이 깨끗해지곤 한다. 프랑스어는 특히나 초기 진입이 어려운 언어로 꼽힌다. 그렇기 때문에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런 시간표는 처음 공부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약간 놀란 것은 흔히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프랑스어 문법에 대한 설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문법이 어려운데 왜 문법에 대한 설명은 적을까?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의 특징이 아닐까 싶은데 처음 외국어를 접할 때 복잡한 수식과 암기 사항들을 만나게 되면 쉽게 지루해지고 거부감마저 생긴다. 우리가 우리말을 배울 때 문법책을 먼저 펼쳐놓고 배우지 않았듯이 외국어를 배울 때도 문법은 일단 기초적인 수준만 가볍게 아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이런 편집 방식은 여전히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책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의사소통 즉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실전이라는 말이다. 인생이 실전인 것처럼 언어도 실전이다. 문법 이론 따져가며 머릿속에서 번역하지 말고 바로 말을 하자는 의미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대화 주제가 기존의 외국어 학습 서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어 무작정 따라하기와 조금 다른 부분인데 좀 더 일상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주제들을 잡아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으로 내용이 거의 다 일상의 대화다. 좀 더 많은 사례들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책의 분량 문제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가능하다면 프랑스어편도 시리즈로 출간이 된다면 좀 더 많은 그리고 현실적인 주제들을 다룰 수 있을텐데 그러려면 이책이 많이 팔려야겠지.


미리보는 프랑스라는 미니 코너를 통해 프랑스의 관광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공부하다가 잠깐잠깐 쉴 때 읽어보면 좋다. 이제까지 몰랐던 이야기들도 제법 많이 나온다. 좀 더 바란다면 이런 코너에서도 생활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박스 기사를 넣었으면 어떨까 싶다. (물론 문법만 아예 밖으로 빼내서 소개하는 코너도 있긴 하지만 여행과 직접 연결되는 어휘나 표현은 좀 더 실감이 난다)


본문은 이런 식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는 mp3로 같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외국어는 발음이 중요한데 프랑스어는 아무래도 좀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처음 프랑스어를 배우는 경우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책의 내용과 음성 파일을 대조해가며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부록으로는 어렵다고 소문난 프랑스어 동사 변화를 짬짬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소책자가 들어있다. 프랑스어는 처음에는 참 다가서기가 어렵지만 공부를 할 수록 익히기가 편해진다고 한다. 길벗의 무따기 시리즈의 막내가 된 프랑스어 무작정 따라하기와 함께 프랑스어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프랑스어 무작정 따라하기


펭귄클래식 리뷰단에서 이번에 보내온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한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듯한 제목이지요. 아마 줄거리도 막연하게나마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제 서평에 줄거리는 적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막연하게나마 알고들 계신 줄거리는 한 남자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 하게 됨을 아쉬워하며 자살한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게 이 소설의 줄거리만 끌어내자면 전부입니다. 어쩌면 큰 이슈가 될만한 것도 아닌 이책이 거의 3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만 보고 읽을 책은 아니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책의 내용은 괴테의 경험에서 끌어낸 것입니다. 흔히 고백 문학의 시초로 이책을 꼽는 것도 그런 이유지요. 여주인공 로테(혹은 롯데)는 괴테가 실제로 사랑한 로테의 이름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소설에서처럼 괴테가 자살을 하지는 않은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자, 이제 한번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요. '사랑을 위해 죽다.'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시나요?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 사람만을 살려야할 때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최근에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때문에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요즘의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남자가 혹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훌훌 털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돼" 아마도 요즘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은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베르테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멀리서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요? 다른 이와 결혼한 사람의 미래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축복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쉬운 질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책의 대부분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펼쳐 집니다. 초반부만 해도 베르테르의 냉철함과 확고한 철학이 빛납니다.  

"인생이 꿈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바이지만, 나 역시 어딜 가나 그런 느낌을 받는다네. 인간이 지닌 활동적인 탐구력 역시 한계에 갇혀 있음을 볼 때, 그리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채우는 쪽에 머물며 이 욕망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불쌍한 생을 연장하는 데 봉사할 뿐..."

이라는 문장을 읽게 되면 베르테르가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인물이고 나름의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로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베르테르는 욕망에 의해 흔들리는 인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역시 한편에서는 욕망의 일종인데 다른 편지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끊임없는 헌신을 바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던 그가 로테를 만나고 기존의 생각이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이 우리의 가슴에 무엇일까! 빛이 없는 마법의 등잔이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하나 싶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해 본 분들이라면 공감이 되실텐데 저는 그런 사랑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를 한번 만나고 이렇게까지 변하게 되는 것이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꼭 겪어보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베르테르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결혼일까요? 적어도 베르테르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사랑을 한다면 최종적으로는 결혼을 해야 그 사랑이 온전해 지는 것인가요? 저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베르테르는 말합니다. "꼭 이래야만 하는가? 인간의 행복의 원천이 그의 불행의 근원이 되다니" 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무게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로테의 남편에게서 총을 빌려 그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물론 로테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말이죠. 어쩌면 굉장히 치졸하고 비겁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겪는 로테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도취된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이 옷을 입은 채로 묻히고 싶습니다. 로테, 당신이 만져서 성스러워진 이 옷을 입은 채로 말입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 그것도 부탁해 놓았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마음이 답답해 집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의 마지막 부분과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정녕 로테를 사랑한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은 클라이맥스를 보여줍니다.

"권총은 장전되었습니다. 시계가 12시를 치네요! 자 이제! 로테! 로테, 잘 있어요! 잘 있어요!"

이 정도면 상대방에 대한 만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이에게 모든 짐을 떠안겨 버립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맺어질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는 것인데 죽으면 조용히 죽지 사방팔방 다 이야기를 하고 당사자에게 편지까지 남깁니다. 요새말로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한 인간상이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책에 대한 해석은 독자마다 차이가 큰 편인데 적어도 제가 읽기에는 이렇습니다. 베르테르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내던진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책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일꾼들이 유해를 운반했습니다.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괴테는 베르테르의 모든 행동이 옳지 않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사회 안에서 성직자의 축복도 받지 못한 장례식이란 말 그대로 버려진 죽음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읽고나서야 앞부분을 읽으면서 느꼈던 베르테르의 비겁함과 찌질함이 해소됩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타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베르테르라는 인간에 대해 괴테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의도와는 반대로 이책의 출간 이후 수많은 자살자들이 양산되었는데 아마도 마지막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이번에 건네진 책은 '스님의 청소법'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입니다. 게다가 걸레 한 장으로 삶을 닦는다는 수식어까지 붙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청소와 수행은 어떤 관계가 있고 그것이 인생에는 또 어떤 영향을 줄까 궁금해집니다.

수도자들에게 있어 청소는 상당히 중요한 자기수양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책을 통해 불교의 청소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가톨릭의 수도자들에게도 청소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만이 아닌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놓일 자리에 제대로 놓는다는 말이지요. 한번 지금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세요. 온갖 물건들이 제자리에 바르게 정리되어 있으신가요?


책에 실려 있는 내용들은 어찌 보면 새로운 것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위의 목차를 가만히 들여다봐도 '아, 다 맞는 말이네'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굳이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말이죠. 하지만 이책의 의미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스님이 직접 실천한 뒤에 그 이유와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그것이 실행할 수 없다면 공염불에 그치는 법입니다. 수많은 힐링서적들이 유행하는 요즘이지만 저자가 직접 실천을 하며 증명까지 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책의 구성이 비슷해 살펴보니 예담에서 나온 책입니다. 재생지 특유의 진한 향과 글이 꽉 차지 않아 여유로운 편집 그리고 큼직한 폰트의 배치가 특징이죠. 다만 이책은 '색'을 써서 강조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진이 들어가있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수행'이라는 틀 안에서 '색[色]'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실 청소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거의 매일 이루어지다시피 하는 아주 사소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마치 살림이 그렇듯이 청소라는 것은 해도 티도 잘 나지 않고 막상 하는 동안에는 손도 많이 가고 신경도 제법 쓰이는 꽤나 피로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보니 청소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겠지요. 하지만 청소를 하지 않으면 금세 티가 납니다. 책상 위에 샇인 먼지들이 하루만 지나도 손가락에 묻어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그 청소를 즐겁고 하고 싶은 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변화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적은 것처럼 청소란 버리는 것만이 아닌 제자리에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방 안에 있는 수 많은 물건들 중에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간직해야할까요? 언젠가는 쓰이겠지하고 구석 어딘가에 넣어두는 것은 일종의 낭비입니다. 스님은 차라리 그런 것들을 바로 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공감은 가지만 막상 실천해보려면 쉬운 일은 아니겠죠? 특히나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들은 그 처리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그 물건을 주기 위해 들인 노력이 컸다면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 낫다'고 말이죠. 제법 명쾌한 해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물건들을 제자리에 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쓰임새를 내가 알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내가 그 쓰임새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고 한편 생각해보면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방 안을 하나둘 정리해나가다가 어디에 두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바로 위에 적은 '버리는 일'을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쓰임새가 있는데 내게는 딱히 쓸데가 없다면 그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결국은 이런 맥락이 아닐까요.


스님은 청소하는 행위 자체에 또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그 행동 자체에 말이죠. 청소를 하는 동안 그 행위 자체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다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정소하는 행위 자체를 번거롭거나 거추장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가 함께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청소라는 행위와 그 결과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하나둘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수행과 다름없다는 것이 스님이 끝내 건네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지금 앉아계신 사무실의 책상이나 방 안의 모습이 자신의 마음속이고 자신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봤을 때 얼마나 정리되어 있고 깨끗한가요? 혹 지저분하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손을 들어 하나둘 치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지요. 그렇다고 새로 청소도구를 사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어지간한 청소는 몸과 걸레 한 장이면 충분하니까요.


때로는 글보다 그림에서 더 많은 느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림 한 장, 사진 한 장이 건네는 말은 도무지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때 적당한 소통수단이 되지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글이 많은 책보다 그림이 큼직큼직한 책들을 읽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인생"을 설명하려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로 혹은 말로 그것이 쉬우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 한 장이라면 그것이 가능하지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책에 대해서는 뭐랄까 편견이랄까요 그런게 있어서 나이가 들면 읽지 않는 책정도로 치부했었지요. 사실 소설보다 만화책이 재미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어느날 제손에 이 큼직한 책 한 권이 건네졌습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라는 긴 이름을 가진 친구가 주인공이지요. 아이는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그러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열심인 그런 착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는 길에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악어가 나타나 장갑을 물어가기도 하고 산더미만한 파도에 옷이 모두 젖기도 합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는 그런 모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아이는 그런 일들에 불만이나 불평을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지각을 하게 된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어른"인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오는 길에 악어를 만나 장갑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느라 늦었다면 뭐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뭔가 마음이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일어난대로 느낀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사실을 말하고도 반성문을 300번이나 써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묵묵히 반성문을 적습니다. 무어라 반발을 한만한데 그러지 않았지요. 그것이 더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여러 번의 반성문 쓰기를 반복해야했지요. 아이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생겼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털복숭이 고릴라가 선생님을 잡아 천장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선생님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 도와 달라고 소리칩니다. 분명 아이의 눈에도 고릴라가 보이고 선생님을 잡아 천장으로 끌고 올라간 모습이 보였겠지요.


하지만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선생님이 이제까지 자기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줍니다. 이것이 이책의 마지막 장면인데 복수나 앙갚음을 해서 통쾌하다는 감정은 전혀 들지 않고 마음속이 뭔가 짠해오는 느낌입니다. 이책에 쓰인 글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글자만 따로 뽑아놓고 보면 한 페이지도 될까말까 하지요. 하지만 이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을 봐야 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말이죠. 그림의 구석구석에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이 담겨있으니까요.

이책은 아이들보다는 어른을 위한 책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아이들이 읽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제법 깊이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늘 자기가 바라보는 눈높이로 세상을 재단질합니다. 비단 세상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특히나 선생이나 부모와 같은 '교육'을 맡은 이들은 아이들에 대해 그 재단질을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경우 그 재단에 사용되는 자와 가위가 어른의 손에 들린 것이라는 데 있는 것이죠. 아이들의 눈과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과 순수함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던져 버립니다. 흔히 순수함이 사라졌다. 아이같지 않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어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든 것이죠. 어른의 잣대를 아이에게 들이대니 아이 입장에서는 그 자의 길이에 그리고 그 눈금에 맞추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순수함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어린아이뿐 아니라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일은 제법 많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참 오랜만에 읽은 그림책 한 권이 많은 생각과 가르침을 전해 줍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를 않는 하루였습니다. 





아주 작은 책이 한 권 도착했습니다. 종이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쩐지 정감어린 표지의 그런 책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라는 꽤 감성적인 제목은 다름 아닌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독자를 사랑하는 이라 부르고 그에게 이런저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필체가 워낙에 부드러워 글을 조금만 읽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딱딱하고 거친 말투가 익숙한 우리네들에게 이렇게 다정다감한 말투가 어색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누구라도 이런 말투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작은 책이지만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사랑을 고민하는 이, 일상에 지친 이, 건강한 삶을 원하는 이,외로운 이 그리고 이 순간 행복을 바라는 이..이렇게 다섯 경우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장을 분류를 해놓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페이지가 손길가는대로 펼쳐 읽어도 마음에 와 닿는 그런 매력을 가진 책입니다. 


저자가 이책의 글들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어떠신가요? 지금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세요. 만약 자신의 생명이 며칠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저자는 그 하고 싶은 일을 글로 옮겨 적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운명의 시간에 어떤 일을 후회하게 될지 이미 알고 계실텐데 저자처럼 그 일들을 바로 실행해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그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저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정말 어렵지요. 그렇게 간직해둔 '언젠가 해야할 일'들.. 마음속 깊이 묻어 둔 '할 말'들, '할 일'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요. 해야 한다는 부담을 떠 안은 채 말이죠.

각각의 장은 또 작은 이야기들이 소품처럼 펼쳐져 있는데 두 세 페이지의 길지 않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적어 줍니다. 해답이라고 적었지만 오히려 조언에 가깝습니다. 저자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책이나 영화나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라고 말을 건넵니다.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해봐요..라는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는 법입니다.

이책이 마음에 든 점 중의 하나는 편집인데 중요한 이야기는 다른 색과 크기의 폰트를 사용해 도드라지게 하고 있는데 재생지와 어울리면서 뭔가 흐린듯하면서도 선명한 색상들의 조합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제법 많은 양의 사진들을 함께 담고 있는데 종이의 특성상 제법 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오히려 선명하고 뚜렷한 이미지가 아니라 배경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힐링'이라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 있는 요즘이지만 정작 그런 홍보문구를 강조한 책들을 보면 마음의 치유를 받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책은 오히려 그런 말이 없음에도 '힐링'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런 책입니다. 보통 힐링이나 자기계발서들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좀처럼 실천에 옮기지 못 하는 이야기들을 되새기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 못 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다는데 큰 매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생각보다 우리 마음에 크게 다가옵니다.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고 말이지요.

표지에 보면 '내일이 아닌 오늘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이라는 문장이 적혀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미래와 꿈을 이야기할 때 이책은 현재와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점만으로도 이책이 가진 의미와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참 오랜만에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책을 접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습니다. 요즘은 책들도 너무나 급하고 빠른 패스트 북이 주를 이루는 데 이책은 말 그대로 슬로우 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가끔 몸이 지칠 때 하늘을 보고 큰 심호흡을 하듯이 이 작은 책 한 권으로 마음의 지침을 풀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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